[임유진의 무대읽기] 연극 '질투’
관객 몰입도 높아…이만희 희곡 원작
지난 5월22일부터 25일까지 소극장 ‘공연 일번지’에서는 아주 유쾌한 연극 한 편이 올라갔다. ‘연극문화공동체 DIC’의 ‘질투’라는 공연이었다. ‘질투’에는 연배가 좀 있는 등장인물이 셋 나온다. 잠깐 등장하는 ‘손님’역의 배우까지 하면 총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있지만, 말 그대로 ‘손님’은 짧게 등장했다가 퇴장하고 연극은 그 세 명의 배우만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규는 이혼하면서 전 재산을 부인에게 거의 다 주다시피 한 60대 중반의 사내다. 그는 화분 사업을 하는데, 사무실로 쓰는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한다. 그에게는 춘산이라고 하는 동업자 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완규가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동네에서 약국을 하는 약사 수정이 찾아온다. 그녀는 완규에게 단둘이 여행을 가자고 청한다.
사실 완규는 수정에게 전부터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수정의 제의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친구인 춘산이 평소 수정과 자신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처럼 행동했기에 친구와의 의리를 택한 것이다. 춘산과 수정의 분홍빛 연애는 나중에 오해로 밝혀진다. 춘산이 수정을 두고 혼자 상상한 것을 완규에게 말한 것뿐이었다. 오해가 풀린 뒤에 완규와 수정은 ‘황혼의 로맨스’를 시작한다.
연극에서 배우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질투’라는 연극을 할 때, 나이 지긋한 그 역을 젊은 배우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희곡 속의 등장인물과 그 역을 한 배우의 나이가 얼추 비슷해 보였다. 그 점이 좋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이 든 배우가 교복을 입고 나와서 고등학생 역할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요즘이지만, 아무래도 제 나이 때의 배우가 역할을 하면 감정 이입과 몰입이 쉽다. 이번 ‘질투’가 그랬다. 작품 속 인물과 비슷하게 생각되는 나이대의 배우들이 나와서 역할을 하니 실감 나는 무대가 펼쳐졌다.
인물과 딱 들어맞는 나이대의 배우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연기를 펼치니 어떤 위화감도 없이 무대로 빨려 들어가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완규 역의 배우(윤희철)는 몸매 자체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자아냈는데, 그가 D자 형으로 불룩 나온 배 위에 발레리나들이 입는 망사 치마를 걸치고 춤을 추거나, 수정과 커플로 맞춘 잠옷 윗도리의 단추가 그의 배 위에서 터질 듯이 위태로울 때 관객은 더없이 즐거워하였다.
이 연극에서 가장 특기한 점이 바로 관객이었다. 연극의 네 번째 요소라고 불리는 관객 말이다. 주로 중년을 훌쩍 넘긴 이들이 관객이었는데, 그들이 무대에 감응하고 보내는 반응은 이제껏 어떤 연극 공연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관객은 완규와 수정의 로맨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진지하게 감상하면서, 아무런 경계 없이 웃음을 터뜨렸고 심지어 판소리 무대가 아님에도 추임새를 넣는 관객까지 있었다.
제일 놀라웠던 것은 하나의 장면이 끝나고 암전이 될 때마다 관객이 치는 열렬한 박수였다. 무슨 유명한 뮤지컬 넘버가 끝난 것도 아니고, 무용수들의 어려운 파드되가 끝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동원된 관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박수와 함성, 그리고 그 끝에 묻어나오는 감정이 너무나 진심이었다. 관객은 자신들의 현실 혹은 로망을 연극 무대에 삽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배우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질투’는 무대의 기본이 되는 희곡의 완성도가 높았다. 이만희의 희곡이었다. 희곡이나 연극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알법한 작품이 있는데 김유진 감독의 영화 ‘약속’이다. 1998년 작으로 박신양과 전도연 주연의 영화였다. 그 영화는 이만희 희곡 ‘돌아서서 떠나라’가 원작이다.
‘질투’는 현재 동국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작가 이만희의 최신작이었다. 1954년생인 작가가 나이 든 이들의 분홍빛 연애 사건을 그린 것을 인물과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재현하고 또 그것을 비슷한 나이대의 관객이 보면서 교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약간 기이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젊고 파릇파릇한 청춘들의 로맨스는 그것을 보는 나이 든 이들의 과거를 소환하면서, 한숨과 함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 옛날의 설렘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런데 여기 마음은 청춘일지 모르나 육신과 삶의 조건은 노화를 이기지 못한 노년들이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노인과 사랑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어울리고 아름답다. 늙으나 젊으나 큐피드의 화살은 아름다운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연극 ‘질투’는 그 화학 작용이 인간의 삶을 조금 더 생기있게 만들 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