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10월, 제헌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된다.
초대 위원장은 김상덕. 영화 ‘파묘’에서 풍수사 최민식이 사용한 바로 그 이름이다. “민족을 위해 음지에서 고생하셨던 독립운동가를 감히 소환해보고 싶었습니다.” 반민특위에 대한 장재현 감독의 ‘오마주’다.
김상덕 위원장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문화부장이었다. 1918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래 외길 인생을 걸었던 그는 3·1운동의 불씨가 된 2·8 독립선언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자 이미 군과 경찰 요직에 있던 친일 세력의 역공이 시작됐다. ‘국민화합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 그 대열 맨 앞에 국내 정치 기반이 허약한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 치사케 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이 킬러를 고용, 김상덕 위원장과 반민특위 위원 암살 계획을 세웠고 화신백화점 박흥식이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천인공노할 범죄는 실패했다. 살인청부업자가 ‘친일파 자금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며 돌연 자수했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정륙 고문은 바로 그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이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갓난아이였던 막내 여동생은 굶어 죽었고 네 살이던 김 고문은 누나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중국 땅 곳곳을 쫓겨다닌 임시정부 요원들의 삶, 그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실상이다.
어느 야심한 밤, 대통령 경호팀이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 안팎에 배치되고 곧 이승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승만-김상덕 독대였다. ‘노덕술은 반공투사이니 풀어주라. 경찰들 건드리지 말자.’
“1949년 5월 말쯤, 이 대통령이 관사로 찾아와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겠다며 아버지를 회유했어요. 아버지께선 ‘민족의 등에 비수를 꽂은 매국노들을 감춰주는 대가로 흥정하자는 거냐’며 매우 화를 내셨어요. 이 대통령이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반민특위가 큰 곤욕을 치르겠구나’ 직감했어요.“
며칠 뒤 반민특위는 서울 중부서 무장경찰들의 습격으로 와해됐고, 다음 해 6·25가 터지자 김상덕은 북한 정치보위부 직원 2명에 의해 납북됐다. 이후 김 고문은 ‘월북 빨갱이 아들’이라는 멍에를 안고 신문 배달과 공사장 일용직 등을 전전했다.
그에 대한 감시는 1990년 아버지인 김상덕 위원장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뒤에야 끝이 났다.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공격한 날이 6월 6일이다. ‘국민들이 매년 6월 6일 반민특위 피습을 기억하니 이승만 대통령이 하필 이날을 현충일로 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은 그래서 나온다.
# 올해 6월 6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오후 2시, 명동 롯데백화점 건너편 반민특위 터(현 스탠포드호텔)에 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가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와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우사김규식선생기념사업회, 시민모임 독립, 청년백범 등이 후원한 행사였다.
참석자들은 나석주 의사 의거 현장(현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동양척식회사 터)과 조선 귀족회관 터, 이재명 의사 의거 현장(명동성당 입구, 이완용 암살 시도 터), 이완용 집터 등을 돌아보았다.
이어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열린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는 300석 좌석이 거의 찬 가운데 진행됐다. 김정륙 고문과 이학영 국회부의장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사회를 맡은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반민특위가 제헌국회 의원들로 구성됐으니 내년 기억행사부터는 국회에서 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은 당시 중부서 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민특위 명예회복’ ‘경찰청장 공식사과’ 등의 구호가 메아리쳤다.
김상덕 위원장 납북 당시 먼발치서 아버지를 떠나보낸 열다섯 소년은 어느덧 구순을 맞은 노인이 됐다. 김정륙 고문은 ‘더 늦기 전에 헌법기관을 파괴하고 민족정기를 짓밟은 데 앞장섰던 경찰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중에 뵈면 용서를 빌어야겠죠. 못난 자식을 두셔서 지금까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이번 22대 국회 개원식엔 반민특위 유가족들이 초대되고, 우원식 국회의장의 연설에 반민특위 관련 발언이 포함될 예정이다. 반민특위 관련자 후손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여파’의 국회 시사회도 예고됐다.
가을엔 반민특위와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학술토론회가 국회 공식 행사로 개최되고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의 국회 사단법인 설립도 추진된다. 2024년은 반민특위 해체 이후 75년 만의 역사적 해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는 때로 무심한 것 같고 때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이렇게 반드시, 엄중한 청구서를 보내온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