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무대읽기] 연극 ‘사난 살주’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현장”
지난 5월 12일 광주예술의전당에서는 ‘사난 살주’라는 조금 특이한 제목의 공연이 한차례 있었다. ‘사난 살주’는 제주도 방언이다.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살아 있으니’ 앞에는 ‘죽지 못해서’라는 의미가 첨언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마) 죽지는 못하고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삶에 ‘사난 살주’라는 네 음절에 포함된 절망과 고통이 느껴진다. 대체 어떤 삶이길래 죽지 못해서 살아간다는 말인가.
‘사난 살주’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두 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는데 1부는 ‘억장’, 2부는 ‘감천’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제주 4·3과 광주 5·18, 4·16 세월호 참사, 그리고 10·29 이태원 참사가 주 내용이지만, 미디어 영상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4·19의 도화선이 됐던 고 김주열 열사의 사진으로 시작했다. 어린 학생의 얼굴에 박혀 있는 최루탄을 보는 순간부터 벌써 가슴이 답답하고 그 유가족의 심정을 생각하자 ‘억장’이 무너졌다. 그렇게 영상은 5·18과 박종철 군, 이한열 군, 그리고 2023년에 실종자 수색 중 급류에 떠밀려 간 채수근 상병까지 죽 이어졌다.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가 나와서 증언을 시작한다. 10살에 아버지를 잃은 피해자였다. 제주도 방언을 사용하는 여인의 증언이 너무나 절절하여 실제 유가족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제주 출신의 배우 현애란 씨였다. 다음으로는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남자가 나와 동무들과 놀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형의 이야기를 전한다. 겨우 11살이었다, 그 형은. 이제 장년이 되어 어린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형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생은 그때 고작 8살이었다. 이 비통한 사연을 전하는 사람도 역시 배우였는데, 광주에서 활동하는 연극배우 김호준 씨였다.
1부에서 미디어 영상과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억장’이 무너지는 사연을 전한 공연은 2부에서는 실제 유가족이 등장하여 관객과 소통한다. 2014년 4월 16일, 들뜬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딸의 아버지가 나왔다. 고 문지성의 아버지 문종택 씨였다. 그가 만든 세월호 참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의 세월’을 본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무대 위에서 그를 실제로 보고 육성을 들으니 영화에서 전달받은 마음이 새롭게 사무쳐 왔다.
10·29 이태원 참사로 고귀한 생명을 잃은 故 문효균의 아버지 문성철 씨도 무대에 올랐다. 핸드폰에 작성해 온 글을 띄엄띄엄 읽는 한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은 그 어떤 훌륭한 연기자도 표현해낼 수 없는 진심을 관객에게 전달했다. 작은 한숨마저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비통함이 무대와 관객석을 꽉 쥐어 잡았다. 1부에서 열연한 배우들을 뛰어넘는 진정성이 거기에 있었다.
그 진정성에 공감하는 관객의 고통스러운 숨죽임과 억제된 흐느낌을 들으면서 아우구스또 보알을 떠올렸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효한 그의 연극 이론이 어쩌면 지금 이 공연에 가장 들어맞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곡과 배우, 무대 그리고 관객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이라는 장르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억압을,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보알의 생각들이 지금 여기 이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 생각은 공연의 마지막에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더 공고해졌다. 관객들은 기억하겠다고, 잊지 않겠다고 했고 또, 함께 하겠다고 했다. 억눌린 자들, 국가 폭력에 억압받고 있는 자들, 개개인의 일상에 직접 닥친 일이 아님에도 무대에서 재연되었던 사건들의 의미를 깨닫고 연대하려는 자들의 희망과 인간다운 삶에의 불꽃이 타올랐다.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현장이었다.
‘사난 살주’는 2011년에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에 내려갔다가 13년째 살고 있는 연극인 방은미가 기획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그는 제주에 살면서 사람다운 삶을 파괴하는 국가 폭력의 위력을 온몸으로 느끼고 어떻게 하면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번 작품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난 살주’는 전통적인 연극은 아니다. 방은미가 이름 붙인 것처럼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힘이 있었다. ‘진정성’이라고 하는 힘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국가에 의해서 자행된 폭력, 무엇 때문이지 무슨 이유에선지 자국의 국민을 짓밟고 무참히 생명을 앗아가는 어긋난 권력을 고발하고 그 어긋남에 대항하자고 외치는 진심이 있었다.
‘사난 살주’는 2024년 3월에 제주에서 먼저 무대에 올랐고, 광주가 다음이었다. 공연의 구성을 생각하면 여타의 공연처럼 무대에 여러 번 올리기 힘든 작품이다. 그나마도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와 광주인권평화재단의 재정적 지원과 연출을 비롯한 구성원들의 노 개런티에 바탕한 자발성에 의해서 성사되고 있는 공연이다. 그들에게, 또 뜻깊은 공연에 힘을 보탠 이름 없는 시민들과 어렵고 힘든 발걸음으로 무대에 함께 한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이 공연에 함께하며 연대의 뜻을 다진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