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무대읽기] 남성 창극 ‘살로메’
“아름다움만이 극의 존재 가치인가?”
지난 5월 30일과 31일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1에서는 남성 창극 ‘살로메’의 공연이 있었다. ‘살로메’는 아일랜드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작품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성서에 짧게 언급된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1막의 짧은 희곡으로 극화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원한 유대 공주 살로메의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르코 복음에 실려 있다.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는 유대의 왕 헤로데가 의붓딸인 살로메의 청으로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준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사실 요한의 목을 원한 것은 살로메가 아니라 살로메의 어머니이자 헤로데의 부인인 헤로디아 왕비였다. 헤로데가 왕이었던 형을 죽이고 왕이 되면서 형수였던 헤로디아를 부인으로 삼았는데 세례자 요한이 이를 비도덕적인 근친상간이라고 비난하면서 헤로디아는 요한을 싫어하게 된다. 헤로디아는 살로메를 사주하여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살로메를 어머니의 사주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로 만들었고, 살로메는 이후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팜므 파탈(남자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요부)의 전형이 된다. 이번에 공연된 남성 창극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의 해석에 극적인 극단성을 더하여 비극적인 파멸로 가득 찬 무대를 만들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살로메, 그리고 살로메를 흠모하던 군인 한 사람(나라보스)만 죽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에 등장한 주요 인물 7명 중 6명이 죽음에 이른다. 이들의 행동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직조하기 위해 엇갈리는 사랑의 화살표가 등장한다. 우선 살로메는 우물에 갇힌 세례자 요한을 원한다. 그런 살로메를 흠모하는 군인 나라보스가 있다. 나라보스를 사랑하는 메나드는 왕비의 시종인데, 왕비는 메나드를 사랑한다. 또 헤로데 왕은 의붓딸 살로메를 연모한다. 인물들은 서로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누구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살로메만이 자신의 애정을 무시하는 요한을 죽여서 그 사체에 키스할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잘 알려진 대로 유미주의 작가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고,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활동했던 빅토리아 시대는 매우 금욕적인 시대였다. 엄격한 성 윤리와 도덕성이 강조됐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시대 분위기에 반하는 퇴폐적이고 에로시티즘이 난무하는 작품 ‘살로메’를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다.
이번에 공연된 ‘살로메’는 남성들로만 구성됐다. 그래서 주인공인 살로메(김준수)도 헤로디아 왕비(서의철)도 모두 남자 배우가 열연한다. 의외로 위화감은 별로 없었다. 관객 중에는 굳이 모든 배우를 남자가 할 필요가 있었냐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지만, 김준수는 남자 배우 김준수가 아니라 요한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여인 살로메로 보였고, 서의철 역시 자신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요한에 대한 증오와 시종 메나드에 대한 사랑으로 정신 못 차리는 한 사람의 여자였다.
이에 그냥 뮤지컬이 아닌 창극이었는데,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와 우리의 창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음악(김현섭 작곡)도 작창(정은혜)도, 의상(이상봉)도, 조명(문성재)과 무대 장치도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살로메(김준수)가 요한의 목을 가지기 위해 헤로데 왕 앞에서 추는 ‘일곱 베일의 춤’은 공연의 정점을 찍었는데, ‘창을 하는 배우가 춤까지 저렇게 잘 춘단 말인가’라는 감탄사가 연신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한 팜므파탈의 광기 어린 집착 때문에 집단적 죽음에 이르는 결말을 가진 ‘살로메’의 공연이 이 시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렇게 잘 만들어진 무대는 그냥 그 무대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19세기 유미주의 작가의 작품이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이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한 이들은 바로 그 지점을 노린 것이었을까?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자체로 빛나고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아니면 마침 노래와 춤과 연기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기량을 선보일 적당한 작품으로 ‘살로메’가 선택된 것이었을까? 남성들로만 이뤄진다는 특이성과 희귀성을 담보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만 해도 여러 해석이 있다. 도리언이 자신 대신 늙어가던 초상화를 찌르고 죽음에 이르는 소설의 결말이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 예술관을 적시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평소 사회주의에 관심 있었던 오스카 와일드가 결국은 인간의 도리에 대해 손을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결말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번 남성 창극 ‘살로메’는 작품으로만 보면 여러 면에서 우수했고, 눈과 귀를 즐겁게 했으며,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 ‘살로메’였을까? 왜 그렇게 대부분의 등장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이 작품은 단지 아름답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또 다른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작품을 각색한 극작가 고선웅의 말대로 ‘(여전히, 어쩌면 더) 무자비와 욕망으로 꿈틀대는 작금의 시대를 (상징적으로나마) 응징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라면 결국 이번 남성 창극 ‘살로메’는 매우 사회적인 작품으로 분류되지, 유미주의로만 점철된 작품은 아닌데 말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무척이나 호기심이 생기며 '살로메'란 연극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군요.
남성배우가 여성의 역할을 하고 극의 구성이 창극이라니.. 이 내용만 봐도 보편적인 극이 아닌데 작가님의 글을 보면 창도 잘하고 춤도 잘추는 배우들이라~
희곡 작가에 대한 언급과 시대적 배경으로 살을 붙여주니 글 보는 재미가 솔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