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무대읽기] ‘세상 친구’
문화예술공방 ‘바람꽃’ 10주년 기념공연
지난 6월 6일부터 8일까지 금남로에 있는 소극장 ‘공연 일번지’에서는 ‘문화예술공방 바람꽃’의 10주년 기념 공연이 있었다. 오세혁 극작가의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 거야 친구야’라는 긴 제목의 희곡을 ‘세상 친구’라는 제목으로 한종신이 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렸다. 바람꽃은 2022년 ‘제36회 광주연극제’에서 오세혁의 원래 희곡 제목으로 이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었기에 똑같은 작품을 다시 올리는 것인지 아닌지가 일단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희곡만 같을 뿐, 다른 작품이었다. 제목도 네 글자로 줄였고, 연출과 캐스팅도 2022년과 달랐다. 연출이 달라져서인지 작품의 결도 사뭇 달랐다. 오세혁 작가의 작품은 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것이 많은데 이번 공연작은 2022년 것보다 코미디적 요소가 한결 강해 극작가의 작의를 더 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세혁의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 거야 친구야’(이하 친구)는 대한민국의 지난한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전 그리고 분단까지 아우르는 시간적 배경 속에 한동네 친구 사이였던 인물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몹시 무겁고 진지하고 심각한 작품이 연상될 것인데 오세혁은 특유의 재미있는 대사와 해학이 넘치는 상황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주요 인물은 순사 보조원인 만석과 천석꾼의 아들이면서 만석의 둘도 없는 친구인 천석, 소학교도 못 나왔지만 머리가 명석하고 동네 명창인 소출, 그리고 헌병 보조원인 덕수다. 만석과 덕수는 잘사는 집안의 자제들로 세태에 맞춰 각각 순사 보조원과 헌병 보조원이 된다. 소작농의 자식인 소출은 마르크스 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을 바꾸고자 소작쟁의를 일으킨다. 천석은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소작농의 입장을 헤아리는 따뜻한 성품으로 소출과 행동을 같이 하고, 그럼으로써 만석과 갈라지며 긴긴 세월 대치하게 된다.
즉, 연극 ‘친구’는 격변하는 세월 속에 삶의 처지와 조건이 달라지면서 친구끼리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는 세상에 살았던 어떤 친구들의 얘기다. 이 연극은 네 친구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가 중심이 되어 작품을 잘 살려야 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번 공연은 그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우선 겁 많고 소극적인 성격의 만석 역을 맡은 김영택 배우는 모든 행동과 언사가 만석 그 자체였다. 또 지주의 자식이면서도 무산 계급을 이해하는 천석 역의 정낙일도 순박하고 해맑은 천석을 너무나 잘 표현해내 놀라웠다.
친구 중 제일 이기적이고 처세에 강하며 비열한 역인 덕수 역에는 이종경 배우가 열연했는데, 일제강점기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에서 익히 보던 친일파나 일제 앞잡이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연기로 관객을 압도했다. 이종경 배우는 2022년 공연에서는 만석 역을 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완전히 다른 역을 맡아서 잘 소화해냈고, 얄미운 역이면서도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어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덕수를 창출해낸 것도 특기할만한 점이다.
2022년 공연에서 천석 역을 맡았던 배우 김예성은 이번 공연에서는 경직된 좌익 사상을 가진 소출 역을 맡았다. 김예성 역시 2022년과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아주 매력적으로 소화해냈다. 특히 김예성은 희곡에서는 ‘노래를 부른다’라고만 되어 있는 부분에서 관객이 웃음을 참기 힘든 노래를 배우 자신은 전혀 웃지 않고 반복해서 불러야 했는데 배우로서의 진지한 자세와 연습량이 느껴져서 감탄했다.
‘친구’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2020년작 ‘조조 래빗’이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많았다. ‘조조 래빗’은 세계 제2차대전을 배경으로 히틀러를 맹신하는 10살짜리 독일 소년 조조와 벽 속에 숨어 사는 유대인 소녀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연극 ‘친구’와 비슷하게 결코 가볍지 않은 상황(전쟁과 홀로코스트)을 가볍게, 그렇지만 또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게 풀어낸 명작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소작쟁의로 블랙리스트에 뜬 천석을 만석이 풀어주고, 해방이 되어 입장이 바뀌자 이번에는 천석이가 만석이를 풀어준다. 그렇게 좌익과 우익의 헤게모니가 바뀌면서 세상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네 친구는 서로를 죽일 듯이 하다가도 결국은 죽이지 못하고 서로를 구한다. 마치 조조가 유대 소녀를 끝내 고발하지 못하는 것처럼.
‘친구’는 해학이 넘치는 상황과 대사로 비극적이고 엄중한 이야기를 잘 풀어낸 희곡이다. ‘바람꽃’의 2022년 작품 ‘친구’가 비극적이고 아픈 역사에 의미를 더 두었다면, 이번 ‘친구’는 해학적인 요소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관객 중에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많았고 대체적으로 편하게 관람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서 분단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시간은 아프고 힘든 것이었다. 친구와 가족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갈라져 싸우고 피를 보았다.
웃음 속에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희곡의 장점을 균형있게 표현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단 ‘바람꽃’의 창단 10주년 기념 공연에서 ‘친구’라는 희곡이 가진 장점이 완벽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고 본다. 극단 ‘바람꽃’이 지역을 대표할 문화예술 공연을 만드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는 초심대로 지치지 않고 광주 연극을 죽 이끌어나가길 바란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