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트럼프와 코로나19 그리고 ‘동양인 혐오’

지난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을 연재한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 가족커뮤니티 사업단 교수진이 올해도 칼럼을 이어갑니다. 본란은 넓은 범위에서 가족과 커뮤니티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성찰을 시도합니다. 사업단은 ‘초개인화 시대, 통합과 소통을 위한 가족커뮤니티인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인문학적 성찰과 상상을 바탕으로 열린 가족, 신뢰와 조화의 공동체 문화를 연구·확산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인스타그램에 개설된 ‘안티아시안클럽뉴욕’ 계정이 올린 총격 암시글. 현재 해당 계정은 삭제된 상태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뉴스1.
인스타그램에 개설된 ‘안티아시안클럽뉴욕’ 계정이 올린 총격 암시글. 현재 해당 계정은 삭제된 상태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뉴스1.

 필자는 최근 두 가지 뉴스를 접하고 떠올리기 싫은 지난 기억을 소환해 냈다. 하나는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트럼프의 기세에 대한 뉴스이다. 그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은 성조기를 배경으로 피를 흘리는 그를 일약 애국적 스타로 부상시켰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19의 재유행에 대한 뉴스이다. 코로나19가 지구를 강타한 지 4년이 지났건만, 코로나19의 끈질긴 생명력은 여전히 우리를, 그것도 취약한 노약자를 중심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트럼프의 득세와 코로나19의 유행이라는 두 사건의 조합은 필자에게 4년 전 미국과 유럽 사회에 만연한 ‘동양인 혐오’를 떠올리게 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코로나19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럼프는 “중국 바이러스”, “우한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자주 입에 올렸다. 미국 주류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트럼프가 의식적으로 부추긴 ‘동양인 혐오’에 동양인에 대해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여태 친구로, 이웃으로, 직장 동료로 가까이 지내던 동양계 이민자는 주류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분리되었다. 코로나19가 야기한 사회적 위기의 순간, 동양계 이민자는 ‘타자’로 대상화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생명을 잃었고 위협 당했다. 미국의 백인중심 주류사회가 이미 200년 가까운 이민역사를 갖고 있는 동양계 ‘이민자’들을 여전히 ‘타자’로 취급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물론 한 사회 내의 특정 인종 또는 민족 집단에 대한 혐오 현상은 단순히 미국 사회만의 문제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자연재해 등으로 사회 내의 불만이 고조될 때, 지배층은 늘 그 불만과 불안의 물꼬를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하게 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권력의 속성이다. 저 멀리 중세 유럽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대혼란에서 소외계층에게 향해졌던 마녀사냥이 그러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회 불안이 증폭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조장 및 방관했다.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유대인에 대한 민족적 편견이 어떤 참혹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여기서 새삼 거론조차 할 필요가 없다.

 권력자 자신에게로 향할지도 모르는 민중의 분노를 사회 내의 가장 약한 고리인 소외계층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 이러한 혐오의 근본 기제이다. 이때 동원되는 것이 낙인과 편견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소수민족 집단에게로 할당된 편견과 선입견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서구사회에서 자행되는 동양계 이민자를 향한 폭행과 살인사건을 미디어에서 접할 때마다, 볼멘 목소리를 낸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서구인을 원망하며 억울하다는 불만을 제기한다. “우리는 한국인인데 그들은 왜 한국인에게까지 폭행과 살인을 저지르지?” “만약 그들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를 향해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한 하소연은 서구인들이 동양인 이민자를, 아니 주류사회가 소수집단을 ‘타자’로 만드는 근본 배경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낼 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주류사회 구성원의 시선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은 ‘낯섦’과 ‘다름’을 통해 불편함을 야기하는 이민자로서 똑같은 ‘타자’일 뿐이지 않는가?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이상한 놈

 “친구가 있다. 적이 있다. 그리고 타자가 있다.”

 우리를 둘러싼 이웃을 분류하는 시각에 대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d Bauman)의 통찰이다. 나에게 우호적인 자는 ‘친구’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적’이다. ‘친구’와 ‘적’이라는 범주는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이분법적 범주이며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런데 바우만에 따르면, 친구인지, 적인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적대적인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자가 바로 타자이다.

 타자성은 모호성(ambivalence)의 범주이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주연의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좋은 놈’과 ‘나쁜 놈’이라는 이분법적 범주 외에 개념적 혼란을 부추기는 ‘이상한 놈(The weird)’이 등장한다. 이 이상한 놈이 바로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적대적인지 확정되지 않은 타자이다. 영어로 weird는 strange와 마찬가지로 이상하다는 뜻을 갖고 있지만 어감은 다소 다르다. strange가 낯설어서 이상하다면, weird는 특이해서 이상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영어의 어감 차이가 어떠하든, 이 두 단어는 공히 ‘좋은 놈’과 ‘나쁜 놈’이라는 익숙한 범주를 넘어서서 뭔가 ‘낯선 특이한 존재’가 있음을 가리킨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만주는 온전한 국민국가로서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국제법적으로는 중국이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일본이 실제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그 사회 구성원의 상당한 부분은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국적과 상관없이, 당시 만주에서 생활하던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의 상당수까지 이제 막 개발되고 있던 만주 땅의 이민자였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민족적, 인종적 ‘낯섦’을 암시하는 strange보다 독특한 개성을 배경으로 하는 weird가 ‘이상한 놈’으로 영화에 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정 사회에서 외모와 언어 그리고 문화가 ‘strange’의 의미에서 낯설게 느껴지려면, 그 사회의 경계 안에 온전한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동질적 국민국가적 정체성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시 만주 사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국민국가(nation)’를 표준으로, 국민국가적(national) 경계를 토대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적어도 그렇게 지각되고 있다. 우리는 ‘국민사회’라고 부르는 그러한 사회에서는 동일한 언어와 관습 그리고 문화를 가진 한 민족이 거주한다는 이른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컨테이너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국민사회라고 지각되는 사회에서 ‘타자’로 일컬어지는 이민자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와는 달리, ‘민족적’ 낯설음을 연상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국민국가로 지각되는 사회에서 ‘타자’로 분류되는 자는 strange의 의미에서, 외모라는 인종적 구분과 이질적인 언어와 관습이라는 문화의 의미에서 ‘낯설다고’ 지각되는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다.

 ‘액체근대’와 타자의 창안

 그런데 과연 ‘타자’의, 다시 말해 이민자와 그 후손들의 ‘낯설음’은 여태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의 ‘낯선’ 외모가 우리에게 지각되기 시작하였는가? 유럽 및 미국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대인은 600년 이상 유럽에서 여러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왔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낯선 외모와 종교 그리고 언어와 관습이 주류사회 구성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80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로 전개되기 시작한 미국으로의 동양인 이민의 역사는 그들의 낯선 외모와 삶의 방식을 미국의 주류사회에 알려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200년에 가까운 세월은 그들이 정착 사회의 정규 구성원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것은 ‘낯선’ 타자로서 유대인과 동양인이 1930년대 독일사회에 그리고 2020년 미국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타자’로 새롭게 구성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류 전체의 역사로 시각을 넓혀 보면, ‘우리’에게 낯선 ‘타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우리의 곁에 존재해 왔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공존해 왔다.

 요컨대 20세기 들어 ‘타자’로 지칭되는, 친구와 적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구분되지 않는 자들은 ‘등장’했다기보다는 엄밀히 말하면 ‘창안’되었다. 다시 말해 주류사회의 필요에 의해 구성되었다(construct). 바우만은 이러한 ‘타자’의 창안을 ‘액체근대(liquid modernity)’에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한다.

 액체 근대 시기 과거 확고했던 정체성들이 녹아내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더 이상 명확히 할 수 없는 정체성 문제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간 ‘고체근대’의 견고한 틀로서 민족국가 내에서 안정감을 느끼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온 ‘보편적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자기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액체근대’에 동질적 내부집단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외부집단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민족적 ‘타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600년 동안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던 유대인이 어느 날 히틀러에 의해 ‘타자’로 만들어진 이치이다.

 미국사회에서 지난 200년간 이웃으로 함께 살아오던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이 트럼프에 의해 졸지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사회적 ‘악마’로, ‘타자’로 호명된 이치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타자의 창안은 “집단의 정합성과 통합을 위한”, “내부의 충성과 협업을 확보하기 위한” 그리고 타자를 “경계 짓고 감시할 수 있기 위한” 방편이다. 동양계 이민자가 타자로 만들어지는 것과 트럼프의 백인 중심 ‘아메리칸 퍼스트’라는 슬로건에서 바우만의 날카로운 통찰을 확인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보편적 타자성의 세계

 주류사회가 ‘타자’를 만들어낼 때 동원하는 수단은 바로 민족적 편견과 선입견을 활용한 낙인 찍기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은 ‘가까이 있는 다름’이 수반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 형식이라면, 인디언 보호구역, 종족적 게토와 같은 것은 물리적 거리를 멀리 함으로써 ‘다름’에 대한 불편함을 장악하려는 시도이다.

 오늘날에는 노골적인 인종주의 대신 집단 간 문화적 울타리 설정을 통해 정신적 간극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낙인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지원된다. 그 과정에서 특정 속성들이 일반화되고, 부정적 평가가 덧씌워진다. 중국인은 더러우며, 필리핀인은 게으르고, 일본인은 간사하다는 식의 낙인화는 타자로 만들어진 집단과 충분한 거리를 취하기 위한 필연성을 정당화하는 기제이다.

 낙인은 원칙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차이’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영원한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러기에 동양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폭력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민족적 인종적 편견을 총동원하여 그들과 자신들과의 ‘차이’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가?

 그러나 타자를 낙인이라는 수단으로 장악하려는 시도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통찰처럼, 가속화된 지구화 과정에서 세계가 ‘보편적 타자’의 세계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타자들’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 타자에게 우리가 타자이다. 경계는 더 이상 지탱되기도, 설정되기도 힘든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지구화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가 한편으로는 사라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문화와 문화 사이, ‘우리’와 ‘타자’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거나 때로는 새롭게 구축되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는 별개로 주류사회의 입장에서, 적어도 관념적으로, 타자는 여전히 ‘낯선’ 존재로 머물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는 여전히 ‘우리’의 기존 질서 속으로 편입시킬지, 아니면 사회적 배제와 억압으로 대처할지 아직 명확히 결정되지 않은 자들이다.

 주류사회는 타자를 ‘우리’ 속으로 편입시킬 것인가 아니면 배제와 억압으로 대처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기존의 국민국가적 모형에 기초하여 미국 백인의 문화를, 독일인의 문화를, 나아가 한국인의 문화를 유일하게 보편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일방적 통합 요구는 더 이상 관철되기 힘든 시대라는 점이다.

 타자를 우리와 함께 미래사회를 개척해 나갈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대상화하는 것은 과거 우리 인류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할 위험을 증폭시킨다. 우리가 타자를 멸살하거나 동화시키지 않으려면, 우리는 ‘보편적 타자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타자이고, 그들이 우리에게 타자인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 바탕에서 그들과의 공존을 새롭게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한 첫걸음은, 여기서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는 없지만, 국민국가적 프레임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서 초국적 이동성에 주목하는 것일 것이다.

 최대희(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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