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무대읽기] ‘통속 소설이 머 어때서?!’
대중성 지향했던 소설가 김말봉 작품 극화
지난 4일 빛고을문화회관에서는 극단 ‘수수파보리’의 ‘통속 소설이 머 어때서?!’라는 연극이 있었다. 1930년대 통속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김말봉(1901~1961)을 소재로 취한 연극이었다. 이 작품은 30편이 넘는 그녀의 신문소설 중 세 개를 뽑아 연극으로 짧게 압축하여 보여주면서 김말봉을 얘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김말봉은 가끔 등장하고, 그녀의 작품과 그녀의 삶에 관해 설명을 붙이는 해설자 두 명이 나온다.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로 이루어진 이 해설자 두 명은 만담을 잘하는 변사를 연상시켰다. 이 두 배우의 역할이 극에 완전히 녹아들었는지는 의문인데, 왜냐하면 말이 너무 빨라서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이 생겼고, 무엇보다 김말봉에 관해 너무 시시콜콜하게 다 해설해버려서 오히려 극의 재미가 반감되는 지점이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배우 모두 아주 노련하고 연기가 출중해서 두 배우에 대한 관객의 호감은 높았다.
해설자 역을 맡은 두 배우 말고도 전반적으로 이 연극에 등장한 배우들의 연기 수준은 훌륭했다. 김말봉의 작품 중 ‘고행’(1935)과 ‘찔레꽃’(1936), 그리고 ‘화려한 지옥’(1945) 세 편을 짧게 극화해서 보여주는 무대에서 배우들은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세 개의 다른 작품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연기하면서도 관객을 흡입하는 능력이 뛰어나 흡사 2024년이 아니라 1930년대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지만 이 연극 무대에서 가장 빛을 발한 건 ‘THE TUNE’이라고 하는 음악 그룹이었다. 특히 음악 감독 겸 보컬을 담당한 고현경의 노래가 뛰어났다. 오프닝 음악으로 나온 ‘개고기 주사’(1938년, 김해송)부터 ‘오동나무’(1931년, 강석연)와 마지막 곡인 ‘그네’(작사 김말봉)까지 음악이 좋은 무대였다. 개인적으로 ‘THE TUNE’이 공연하면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연극 무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지, 너무 튀어서 방해하는 경우도 아니었다.
또 연극은 아주 세밀한 장치들을 사용하여 관객을 몰입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영상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벽장 속에 갇힌 남편을 보여주는데(‘고행’) 2차원 영상이 아니라 좁은 공간에서 괴로워하는 바람 난 남편의 표정과 대사에 맞는 입 모양을 보여주는 식이다.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 같은 것도 현실감 있게 잘 사용해서 극단이 연극을 치밀하게 잘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통속 소설이 머 어때서?!’의 단점이라면 공연 시간이 길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공연을 잘 따라가던 관객들이 2시간여가 다 되어가는 시점부터는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옆자리 친구에게 “너무 길다”라고 속삭이는 관객도 생겨났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는 좀 지루해진 게 사실이다. 김말봉의 작품 세 개를 극화해서 보여주는 서사 구조에서 두 번째 작품이었던 ‘찔레꽃’이 좀 길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핸드폰을 하거나 소리 나게 등을 두드린 건 관객의 예의 없음이지만, 작품이 관객을 추동하는 힘을 점점 잃어갔던 것도 사실이라고 하겠다.
대부분 관객이 연극을 보기 전에는 김말봉이라는 작가를 몰랐을 것 같다. 김말봉은 자신이 통속 소설을 쓰는 것을 당당하게 여겼고, 당시 문학계에서 순수 문학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해 ‘순수 귀신을 버려라’라고까지 일갈했다. 이번 연극 무대로 김말봉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되었을 테지만, 정녕 그것 때문에 이 연극을 만들었을까? 우리 역사에 김말봉이라는 통속 소설 작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김말봉의 통속 소설 세 편을 극화한 무대를 볼 때는 다들 재미있게 보았다. 바람 난 남편, 세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 같은 것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작품의 소재이니 딱히 신선할 것도 없지만, 그래서 더욱 이미 선구적으로 이런 대중적인 통속 소설을 쓴 작가가 있었다는 것에 감탄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어쩌면 연극은 김말봉의 그 ‘당당한 삶’에 관해 좀 더 다른 지점에서 관객에게 말을 건넸어야 할지도 모른다. 김말봉이 ‘순수 귀신’을 얘기했을 때의 시대적 상황과 김말봉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들은, 김말봉의 작품 세 개를 극화해서 보여주면서 김말봉이 가끔 등장해서 한마디씩 하고 해설자들이 다 설명해버리는 극 구조에서는 절실하게 표현되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도 유쾌한 시간이었다. 대중 소설을 지향했던 한 소설가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면서 유쾌하기까지 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일 수도.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