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이끄는 공직자들 깨끗하면
천하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악왕묘 본전에 모셔져 있는 악비의 상. 
 악왕묘 본전에 모셔져 있는 악비의 상. 

 지상의 천국 항주와 악왕묘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원나라를 여행하고 남긴 여행기이다. 이 책 때문에 서양은 동양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것이 대항해시대를 열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르코 폴로는 이 책에서 지상의 낙원으로 항주(杭州)와 소주(蘇州)를 언급했다.

 마르코 폴로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항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수많은 국내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2016년에는 G20 정상회담이 열렸고, 2022년에는 아시안 게임도 있었다. 우리와는 ‘항주임시정부’로 인연이 깊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의거’ 이후 일본의 압박으로 ‘상해임시정부’는 상해조계를 떠나 항주로 와서 임시정부를 이어갔다.

 항저우의 명소는 누가 뭐라 해도 서호(西湖 씨후)이다. 항저우를 찾는 외국인으로서 서호를 찾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서호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 송나라 때의 명장 악비(1103~1142)의 사당과 무덤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악비의 사당과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적다. 항저우를 찾으면 꼭 이곳을 관람하길 권한다.

 악비의 사당과 무덤은 ‘악왕묘(岳王廟)’라는 세로 현판이 걸린 정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전반부는 사당과 전시실이고 왼쪽으로 악비와 아들 악운(岳雲)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사당을 지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비석이 하나 있다. 이름 하여 ‘악비고언비(岳飛苦言碑)’이다.

악비의 고언을 새긴 비석이다.

  악비(岳飛)의 고언(苦言)

 ‘악비고언비’와 관련한 스토리는 이렇다. 악비는 지극한 효자였다.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악비는 너무 슬픈 나머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당시 악비의 처지는 집안을 돌볼 하녀 하나 없었다. 평소 악비를 존경하던 오개(吳玠)란 자가 악비와 친해보려고 2000관을 들여 양반집 규수를 사서 그에게 보냈지만 악비는 단칼에 거절했다. 황제가 함께 술을 마시자고 권했으나 이도 사양했고, 집을 내리려 하자 “적을 아직 없애지 못했는데 무슨 집입니까?”라며 거절했다. 누군가가 “언제쯤 천하가 태평해지겠습니까?”라고 묻자 악비는 이렇게 답했다.

 “문신불애전(文臣不愛錢), 무신불석(武臣不惜死), 불환천하태평의(不患天下泰平矣).”

“문신은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신은 죽음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의 태평하지 않음을 걱정할 필요 없다.”(《금타속편金陀續編》)

 중국 역사상 송 왕조는 가장 약체로 평가 받는다. 특히 북방 금나라의 끊임없는 공격을 당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다. 조정 대신들은 그저 구차하게 평화를 구걸하기 위해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문무 관원을 가리지 않고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뇌물을 착복했다. 국방력은 갈수록 약해졌고, 금나라의 소규모 공격에도 맥을 추지 못하고 패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악비가 이끄는 ‘악가군(岳家軍)’은 게릴라전과 같은 전술로 승승장구했다. 백성들은 환호했고, 악비는 구세주처럼 떠 받들어졌다. 금나라에게 악비는 눈엣가시였다. 금나라는 끊임없이 송나라 조정에 악비를 제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금나라의 간첩이나 다름없었던 간신 진회(秦檜, 1091~1155)와 금나라와 진회를 업고 즉위한 고종(高宗) 황제의 입지가 흔들렸다.

악비의 사당과 무덤으로 가는 입구이자 정문인 악왕묘이다.

  악비의 죽음

 악비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나라를 이끄는 공직자들이 깨끗하면 천하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는 진단이었다. 하나 틀림없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썩은 관료들에게 이 지적은 자신들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치명적인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실세 진회는 악비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것이 흔들릴 판이었다. 진회는 최고 권력자 고종(高宗)을 흔들었다. 만에 하나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는 아버지 휘종(徽宗)과 형님 흠종(欽宗)이 돌아오는 날에는 자신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고종은 서슴없이 진회와 손을 잡았다.

 진회는 악비에게 ‘막수유(莫須有)’, 즉 ‘혹 있을 지도 모르는’이라는 요상한 죄명을 씌웠다. 악비가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를 일이라는 기도 안 차는 죄목이었다. 금나라와 한창 싸우고 있던 악비에게 회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악비와 악가군은 당황했다. 백성들의 반응은 격했다. 철수는 절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진회와 고종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진회는 고종을 자극했고, 고종은 거듭 사람을 보내 회군을 재촉했다. 악비는 울분을 삼키며 회군했고, 도성에 도착한 즉시 체포되어 풍파정(風波亭)에서 처형되었다. 1142년 악비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악비의 답은 단순명료했다. 문관은 돈을 받지 않고 무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울 수 없다. 당연하고 명쾌한 답이다. 다시 말해 공직자들이 청렴하면 나라에 걱정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악비와 악운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영원히 역사에 사죄하고 있는 진회의 철상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악비의 고언’이 던지는 의문

 청백리라는 주제는 단순히 공직자의 청렴에 대한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대척점에 있는 탐관오리 간신들과의 영원한 갈등과 충돌, 그리고 그 갈등과 충돌의 결과에 따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수 있다는 심각한 역사현상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악비의 명쾌한(?) 해답이 아주 침통하고 무겁게 들리는 까닭이다. 그래서 ‘고언(苦言)’이다. 공직자들을 향한 쓴 소리인 동시에 악비와 역사의 고뇌가 묻어나는 씁쓸한 소리이기도 하다. 악비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이 이 고뇌를 더욱 깊게 만든다.

 악비는 탐관오리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죽었다. 악비를 죽인 주범은 최고 권력자인 고종 황제와 진회였다. 진회는 악비를 해치고도 잘 먹고 잘 살다가 편히 죽었다. 그러나 역사는 진회를 그냥 두지 않았다. 역사서에 진회는 간신전에 영원히 박제되었고, 사후 50년 뒤 나라를 그르친 죄를 추궁당했다. 그리고 악비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350년 뒤인 1475년, 공소시효 없는 역사법정은 진회에게 악비에게 영원히 사죄하라며 무릎을 꿇은 철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 꿇렸다.(그 아내와 일당 장준, 만사설의 철상과 함께)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하지만 그 판결과 처분은 늘 더뎠다. 탐관오리와 간신들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 역사의 평가와 역사법정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집단지성의 기억을 통해 신랄한 평가와 법정에 수시로 소환되고 있다. 그럼에도 탐관오리와 간신들은 여전히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제 법과 제도로 이들을 처단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좌절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청산하지 못한 치욕스러운 과거사를 청산할 절호가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청산은 다행스럽게 충신의 뼈를 묻을 수 있었고, 죄 없는 백철로 간신배를 주조했다.”

 * 참고로 우국충정에 넘치는 악비의 ‘만강홍(滿江紅)’이란 작품을 소개해둔다.

 성나 곤두 선 머리칼에 관이 들썩거리고

 난간에 기대서니

 몰아치는 비바람 맞누나

 머리 들어 저 멀리

 푸른 하늘 바라보며 긴 바람할 제

 대장부의 큰뜻 불타듯 하여라

 삼십년 세운 공적 진토같이 여기나니

 구름 속에 달빛 속에 싸워온 팔천 리 길

 청춘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검은 머리 백발 되어 슬퍼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

 정강년 국치를

 눈빛처럼 깨끗이 씻지 못했거늘

 한 가슴에 서린 이 원한

 어느 때나 풀어보랴

 전차를 저기 멀리 휘몰아

 하란산을 짓부셔 놓으려니

 그때 장한 뜻 원수의 살점 씹고

 담소하며 오랑캐의 피 마시리라

 잃었던 고국 강산

 고스란히 되찾아

 도성의 궁궐에 절하리라.

 

 김영수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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