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정문 근처에서 몇 발의 예광탄이 발사된다. 이를 신호로 부대 내 좌익계열이 무기고와 탄약고를 접수, 제주도 출동을 위해 지급된 수천 정의 M1과 99식 소총 등을 탈취한다.
무기고 장악이 끝나자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마이크를 잡고 “전 장병은 연병장에 집결하라”고 소리친다. 광주·전남 근현대사 최대 비극인 ‘14연대 주둔군 반란’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은 14연대 남로당 특정 계열에 의해 발생했다. 중앙당과의 교감도 없었다. 이들이 사건 초기, 지도선이 다른 좌익 장교들마저 다수 사살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이 같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반란군이 “지금 인민군이 38선을 돌파, 남하중이다. 제주 출동 반대, 악질경찰과 보수반동 처단”이라고 외치며 쏟아져 나오자 전남 동부권의 남로당원들도 얼떨결에 모습을 드러냈다.(남로당은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1947년까지 남한 최대 정당이었고 전국 조직이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서울의 남로당 중앙은 경악했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문교부 시찰단원으로 현지에 도착한 김영랑 시인 앞엔 거의 전소된 도심과 좌우익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1만 명이 넘은 양민 사상자가 있었다.
진압군의 함포사격으로 까맣게 탄 종고산과 구봉산 앞에서 독립운동가였던 김 시인은 “우리가 어찌 다시 하늘의 도움을 바랄 수 있단 말이냐…”고 통곡했다. 당초 반군 지도부는 제주로 가는 선상에서 봉기, 북으로 도피하려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부대 내 거사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곤 진압군에 밀려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위기감을 느낀 신생 이승만 정부는 군에 대한 대규모 숙정 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군사책(격)이던 박정희도 사형이 구형됐으나 채병덕 김정렬 등 일본 육사 인맥과 정일권 백선엽 등 만군 인맥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4연대 남로당계 장교와 여순 일원의 남로당원들도 정보가 없었던 ‘무장봉기’. 하물며 지역민들에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50년간 소위 ‘여순반란’이었다.
주객이 완전히 뒤바뀐 이 명칭은 사건 당시 자신의 세발자전거(좀 사는 집이었던 듯)가 불탔다며 철없이 울던 여섯 살짜리 김충조에 의해 1997년이 돼서야 바로잡혔다.
#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15대 국회에서 3선 중진이 된 김충조는 ‘여순반란’을 ‘14연대 반란’으로 해달라는 국회 청원을 주도했다.
‘대구 10·1’과 ‘제주 4·3’도 모두 사건으로 불리는데 유독 ‘여순 10·19’만 반란으로 통용된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학계 일각에선 세 사건 모두 ‘항쟁’ 성격이 있다고 강조하나 논점이 다른 주제이니 생략한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정명(正名) 작업은 국방부장관이 개입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14연대 반란’이 맞고 궁극적으론 그렇게 불리워지겠으나, 군의 사기 문제도 있고 하니 우선 순화된 이름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었다.
고심하던 김충조의 절충안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었다. 그때부터 국가의 모든 공식 표기가 바뀌었으며 교과서도 하나둘 새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6대 국회 때 김충조가 발의하기 시작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도 이후 다섯 번의 시도 끝에 20여년 만인 2021년 드디어 국회를 통과했다. 그간 많은 의원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직도 저변엔 ‘여순반란’이라는 입말이 끈질기게 이어진다. 급기야 최근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중 ‘한국학력평가원’ 등 5종의 교과서가 여순사건을 또다시 '반란'으로 표현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지역 시민사회가 들끓고 광주·전남 시도의회와 제주도의회가 공동성명을 내는 등 파문이 이어지고 있다.
# ‘여순사건’의 충격과 피해가 얼마나 컸으면 이후 여수에서 반정부 집회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그나마 1987년 6월항쟁 말미에 김충조 등이 주도한 ‘6·23 시위’였다.
1980년 광주항쟁이 전남 일원으로 확산될 때도 동부권은 침묵했다. 공권력에 대한 ‘공포 유전자’가 이어진 탓일 것이다.
여수와 순천은 ‘여수엑스포’와 ‘정원박람회’ 등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지난 70여년 덧씌워진 억울한 굴레를 겨우 벗어나고 있다.
역사 문제에서 교과서는 매우 중요하다. 교과서를 집필하는 분들은 이 같은 여수·순천의 76년 쌓인 아픔과 염원을 깊이 헤아려 주셨으면 한다.
국회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우선 이번 국정감사부터 엄중히 대처해야 한다. 특히 해당 지역구 의원들은 교과서 집필 전 과정을 매년 주시할 필요가 있다.
PS : 30일 국회에선 주철현·조계원·김문수·권향엽·문금주·박정현·양부남 의원이 주관하는 토론회가 개최된다. ‘여순사건’ 희생자·유족 지원 방안과 조사기한 연장, 역사 왜곡 방지 방안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