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은 캘리포니아 면적의 4분의 1 조금 못 미친다. 이 좁은 땅에 어디서 ‘태어났느냐’에 따른 사회 문화적 차별과 정치 경제적 불이익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거의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이다.

 어떤 분들은 호남에 대한 차별·비하가 섞인 ‘훈요십조’(고려)와 ‘택리지’(조선) 등을 거론한다. 원래 전라도는 그랬다는 얘기다. 그러나 ‘훈요십조’는 민간 차원의 정서가 아니라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 부산물로 보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한다.

 학계 일각에선 훈요십조가 왕건에 투항한 경주 세력이 권력 실세 중 하나인 나주 그룹, 그리고 마지막까지 저항한 차령 이남 ‘후백제 정체성’ 견제용으로 왕건 사후 조작한 ‘위서’라고 추론한다.

 조선 중기 호남 사대부를 초토화시킨 이른바 ‘정여립 역모사건’도 서인 기득권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을 개연성이 있다. 무엇보다 택리지 저자인 이중환이 호남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허망한 희비극이다.

 결국 위 문건들은 ‘21세기 교양’과 ‘유사 인종주의’(호남차별) 사이에서 도덕적 혼란을 겪는 분들의 정신건강을 위무하는, 알리바이로 보면 될 듯하다.

 # 자유당 시절 전남 광양 출신으로 호남 사투리를 쓰던 민주당 조재천 대변인이 대구에서 3선을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김대중(DJ)도 1961년 강원도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1963년 대선에서 호남은 윤보선보다 박정희에게 더 많은 표를 줬고 특히 박 후보는 전남에서 자신의 고향인 경북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따라서 이 같은 사례를 보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반인권적 호남차별과 영호남의 극단적 표 쏠림 현상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고려와 조선이라니?

 정치에서 지역감정이 동원된 첫 사례는 1963년 9월 19일 대구 수성천변이었다. 5·16 쿠데타 후 처음 치러진 5대 대선 유세에 대구 출신 공화당 이효상 의원이 연단에 섰다.

 “이곳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으로 모시자.”

 대구의 애향심을 저열한 차원으로 건드린 그의 연설에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사실상 ‘영남 패권주의’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선거 공신 이효상은 훗날 국회의장까지 올랐다.

 박정희와 DJ가 맞붙은 1971년 대선은 ‘영호남 갈등’이 본격화된 계기였다. 이번에도 공화당 의장이던 이효상이 나섰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간첩 잡으라고 만든 중앙정보부도 “김대중이 정권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마타도어를 퍼뜨렸다. 박 정권은 상대적으로 ‘유권자가 많은’ 영남을, 지역주의로 이용하려 작심한 것이다.

 DJ가 ‘4대국 안전보장론’ 같은 정책선거로 바람을 일으키자 영남 일원엔 갑자기 ‘전라도여 단결하라’(‘경상도여 단결하라’가 아님)는 벽보가 등장한다. 그러자 DJ 참모들은 어느날 캠프에서 사라진 ‘선거 귀재’ 엄창록을 떠올렸다. 영화 ‘킹메이커’가 주인공으로 다룬 엄창록은 당시 정보부에 납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정희는 1년 후 소위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의회주의자’ 김대중은 조금씩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DJ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필요에 의해’ 어느새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형수이자 ‘교활하고 과격한’ 전라도 출신 반체제 선동가가 된다.

 이후 인사·개발에서의 영남 편중, 저곡가 정책에 따른 호남 농민의 대규모 탈농과 수도권 빈민층 형성,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정권의 적반하장 심리전 등을 거치며 호남차별 정서는 민간에 뿌리내린다.

 # 적어도 여기까진 지역차별의 일방적 피해자였던 DJ는 그러나 1987년 대선 국면에선 소위 ‘4자필승론’에 따른 평민당 창당을 강행한다.

 망국적 지역 갈등에 편승한 이 통한의 결정으로 그는 정권 교체를 무산시킨 책임을 떠안게 됐고 심지어 지역감정의 화신으로까지 몰리게 된다. 스스로 자초한 어이없는 반전극이었다.

 1990년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비호남 연대인 ‘3당 합당’을 전격 선언한다. 김영삼의 대변신이자 보수화였고, DJ는 기존 호남차별 정서에 고립 구도까지 더해져 대권에서 훨씬 멀어졌다.

 바로 그해 11월, 전남에선 영광·함평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이때 DJ는 누구도 예상 못 한 후보를 공천하는데 바로 경북 칠곡 출신 이수인 영남대 교수였다. 명분은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합’.

 당시 필자가 근무한 매체의 정치 라인은 김원욱 부국장과 위정철 부장 그리고 조일근 차장이었다. 공천 내용에 깜짝 놀란 회사는 선거 기간 현지에 본사 기자 두 명을 상주시키기로 결정한다. 가서 이 ‘희대의 선거판’을 밀착 취재하라는 지시였다.

 PS: 삼가 고 조일근 선배의 명복을 빕니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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