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청천(靑天)’은 꿈인가?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청백리의 표상 포증에게 붙은 별명은 ‘청천’이다. 글자 그대로 ‘푸른 하늘’이다. 푸른 하늘처럼 단 한 점의 사심도 없이 깨끗하고 공평정대하게 법을 집행하고 일을 처리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로부터 ‘청천’은 맑고 푸른 하늘이란 뜻을 깔고 청백리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청천’이란 별칭을 얻은 청백리는 몇 안 된다. 송대의 청백리 포청천(包靑天) 포증(包拯, 999~1062)을 비롯하여 해청천(海靑天), 우청천(于靑天), 임청천(林靑天) 등이 있다.
해청천은 관을 미리 준비한 다음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명대의 청백리 해서(海瑞, 1514~1587)를 가리킨다. 우청천은 청대 초기 강희제가 ‘천하제일 청백리’라고 칭찬했던 우성룡(于成龍, 1616~1684)을 말한다. 임청천은 청나라를 병 들게 하던 아편을 불태우고, 아편을 밀수하던 영국의 상인, 영국의 해군과 맞서 싸웠던 청백리 임칙서(林則徐, 1785~1850)을 일컫는 별칭이다.
중국인들은 또 북방을 대표하는 청백리 포증을 북청천(北靑天), 남방을 대표하는 청백리 해서를 남청천(南靑天)으로 부르거나, 또 이 두 사람을 각각 북포공(北包公)과 남포공(南包公)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북포공이나 남포공에서 포공은 포증이 아닌 청백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포증과 해서는 중국 역사상 명실상부 양대 청백리로 꼽히고 있다.
물론 포증 이전에도 많은 청백리들이 존재했다. 다만 관리의 청렴과 탐욕, 즉 청백리와 탐관오리가 나라에 미치는 심각성을 인식하여, 청백리를 크게 표창하고 탐관오리를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 송나라 때였고, 그 후 정사(正史)에 청백리의 기록인 <양리전(良吏傳)>이 비중 있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는 비추(費樞, 생졸미상 12세기 중반)가 《염리전(廉吏傳)》이란 청백리 관련 전문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 책은 춘추시대부터 수·당에 이르기까지 천 년이 넘는 역사 속 청백리 114명의 사례를 모은 귀중한 기록이다. 중국에서는 청백리란 표현보다는 청관(淸官), 염리(廉吏), 양리(良吏) 등의 표현을 많이 쓰는 편이고, 염리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쓴다.
그렇다면 청백리의 가치를 인식하여 이들의 행적을 처음으로 기록으로 남긴 것은 언제이며 누구일까?
‘순리열전(循吏列傳)’의 의미
청백리들의 행적을 최초로 기록에 남긴 사람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약 90)이었다. 그는 3000년 통사 《사기(史記)》 130권에서 역대 공직자들의 행적을 전문적으로 기록한 네 권을 남겼다.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이다. 이 중 청백리를 다루고 있는 기록은 <순리열전>, <급정열전>, <혹리열전>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 네 권 중 <순리열전>은 역대 청백리들만 전문적으로 다룬 기록이다. 송대 비추의 《염리전》보다 무려 약 1200년 전이었다.
<순리열전>에서 ‘순리(循吏)’란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공평무사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리를 말한다. 사마천은 <순리열전>을 짓는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령이란 백성을 착한 쪽으로 이끌기 위함이고, 형벌이란 사악한 행위를 막기 위함이다. 법령과 형벌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선량한 백성들은 두려워서 스스로 몸조심을 하면서 단속한다. 그러나 관리된 자의 행위가 반듯하면 기강이 결코 문란한 적이 없었다. 관리가 직분을 다하고 원칙을 따르는 것 또한 천하를 잘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어찌 반드시 엄한 형벌과 법만 내세워서야 되겠는가?”
사마천은 순리(청백리)의 기준으로 반듯한 언행, 직분에 충실, 원칙을 지킴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엄한 형벌과 법으로만 백성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암시하고 있다. 먼저 <순리열전>에 수록된 순리(청백리)들에 관한 기본정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모두 다섯 명의 순리가 수록되었고, 모두가 춘추전국 시대 인물들이고 사마천이 복무했던 한나라 때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이와는 대조적으로 가혹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기록인 <혹리열전>은 모두 한나라, 특히 사마천이 모셨던 한 무제 때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한 무제 통치기에 대한 사마천의 신랄한 비판의식의 반영이다.)
‘순리열전’의 가치
먼저 이들의 벼슬을 보면 마지막 이리가 사법관이었던 것을 제외하면 모두 재상을 지낸 최고위급 공직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석사와 이리의 죽음이다. 석사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리는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여 그 책임과 속죄로 자결했기 때문이다.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매우 극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은 <순리열전> 끝부분 자신의 논평인 ‘태사공왈’을 통해 이들의 행적을 간략하게 다시 한 번 요약함으로써 그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손숙오는 한마디의 말로써 도성 영도(○都)의 시장 질서를 회복시켰다. 자산이 병으로 죽자 정(鄭)나라 백성들은 실성하며 통곡했다. 공의휴는 집안에서 좋은 베를 짜는 것을 보고 베 짜는 아낙네를 내보냈다. 석사는 자기 부친을 도망가게 해주고 자결함으로써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대의명분을 세워주었다. 이리는 잘못 판결하여 사람을 죽인 책임을 지고 칼로서 자결함으로써 진(晉)나라 문공(文公)으로 하여금 국법을 엄정하게 만들었다.”
사마천은 다섯 순리(청백리)들이 남긴 업적과 가치를 간결하게 요약하여 이들의 행적과 그것이 남긴 영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조했다. 손숙오는 어지러워진 시장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초나라 장왕(莊王)에게 시장의 원리를 설명하여 정책을 바로 잡았다.
재상을 20년 지냈음에도 장례치를 돈조차 남기지 않았던 정자산의 죽음에 백성들이 실성하여 통곡했다는 말로 정자산이 남긴 영향이 얼마나 대단했던 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죽음으로 아버지의 죄를 대신 치른 석사, 자신의 그릇된 판결로 사람을 죽게 만들자 역시 죽음으로 속죄한 이리의 사례는 그 자체로 진한 감동을 넘어 전율이 느껴진다. 정말이지 우리에게 이런 청백리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까? 이런 자괴감이 든다. (계속)
김영수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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