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이 잘못 판결했으면 그 자신이 벌 받아야”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순리열전’ 청백리들 행적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청백리에 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인 《사기》 <순리열전>에 나오는 청백리들의 행적을 살펴보자. 앞선 회에서 소개했듯이 <순리열전>에 수록된 청백리는 모두 다섯이고 모두 춘추 시기의 인물들이다. 이 다섯 중 손숙오와 자산은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먼저 전국시대 노나라 출신의 박사이자 재상을 지낸 공의휴(公儀休 생졸 미상)의 행적이다. 먼저 공의휴의 자질에 관해 사마천은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재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공직에 나간 다음 공의휴의 일처리는 다음 몇 가지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1 법을 받들어 지키고 법이 정한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2 변칙적으로 규정을 바꾸는 일이 추호도 없었다.
3 공직자들이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게 했다.
4 특히 고위 공직자들은 아무리 사소한 이익이라도 절대 취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원칙으로 공직자들을 이끌었기 때문에 모든 공직자들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단정해졌다. 사마천은 청백리로서 공의휴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 아주 생동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 공희휴가 생선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생선을 선물로 보냈다. 공의휴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 사람이 재상께서는 생선을 좋아한다면서 왜 거절하느냐고 묻자 공의휴는 이렇게 답했다.
“다름 아니라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상으로서 저는 생선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선을 뇌물로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면 누가 다시 저에게 생선을 선물하겠습니까? 그래서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한비자》 <외저설우하> 편에는 공의휴가 생선을 받지 않은 이유가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보낸 물고기를 받게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굽히게 될 것이고, 그런 태도를 가지면 법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법을 왜곡하면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자리에서 물러나면 내가 물고기를 아무리 좋아해도 내게 물고기를 보낼 리 없고, 나 또한 물고기를 살 수 없을 것이다. 물고기를 받지 않으면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물고기를 좋아해도 오래 나 스스로 물고기를 사서 먹을 있지 않겠는가.”
공의휴는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자세를 굳게 지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청렴이란 원칙으로 백성들과 소통까지 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는데 상에 올라온 채소가 너무 맛났다. 어디 채소냐고 물었더니 집 텃밭에서 난 것이라 했다. 공의휴는 텃밭의 채소를 모두 뽑아버리게 했다. 또 집에서 짠 베의 질이 좋았다. 공의휴는 베를 짜는 아낙을 내보내고 베틀을 태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농부와 전문적으로 베 짜는 아녀자들은 농작물과 베를 어디다 팔아야 한단 말인가?”
▲<순리열전> 청백리들 행적 “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여기 살인죄를 지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목숨으로 속죄한 고위 공직자가 있다. 춘추시대 초나라 소왕(昭王 기원전 약 523~기원전 489) 때의 재상 석사(石奢 생졸 미상)가 그였다. (석사에 관한 기록은 <순리열전> 외에 《신서新序》와 《한시외전韓詩外傳》에도 남아 있다.) 먼저 공직자로서 그의 자질은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 정직하여 아첨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로 기록돼 있다.
한 번은 지방을 순시하던 석사가 살인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추격 끝에 붙잡힌 범인은 놀랍게도 석사의 아버지였다. 석사는 아버지를 도망치게 한 다음 자신을 체포하게 하여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왕에게 이렇게 보고하게 했다.
“살인범은 신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잡아 처벌하여 저의 실적으로 삼는 것은 불효(不孝)이고, 법을 무시하고 죄인을 멋대로 사면하는 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석사는 법을 무시하고 살인자 아버지를 도망치게 한 ‘불충’의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한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소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조사의 죄를 불문에 붙이려 했다.
“범인을 추적했으나 체포하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그 죄를 법으로 논할 수 없다. 그대는 직무에만 힘써라!”
석사가 다시 이렇게 아뢰었다.
“자기 아버지에게 사적인 정을 배려하지 못하면 효자가 아니며, 군주의 법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면 충신이 아닙니다. 왕께서 신의 죄를 사면한 것은 주상의 은혜이고, 법에 따라 죽는 것은 소신의 직책이옵니다!”
석사는 끝내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석사의 자결을 두고는 분명 논쟁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아들로서 차마 아버지를 죽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 또한 어길 수 없는 딜레마에서 청렴강직한 석사가 내린 결단의 의미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 당시 청백리의 기본 정신이자 자세였다.
▲<순리열전> 청백리들 행적 “잘못 판결한 제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문공(文公 기원전 697~기원전 628) 때 공직생활을 한 이리(李離)는 법관이었다. 한번은 이리가 판결을 잘못 내려 한 사람을 죽게 했다. 이리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다음 사형을 판결했다. 보고를 받은 문공은 처음 사건을 처리하고 보고한 부하의 잘못이 아니냐며 이리의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문공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신은 소관 부처의 장관으로서 일찍이 하급 관리에게 직위를 양보하지도 않았고, 받는 녹봉이 많아도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잘못된 죄상을 듣고 무고한 인명을 죽이고, 그 죄를 부하 관리들에게 떠넘기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문공은 그렇게 따지면 “나 자신에게도 죄가 있는 아닌가?”라며 반문했다. 이리는 다음과 같은 숙연한 말로 문공의 사면령을 거부한 다음 스스로 목을 그어 죽었다.
“법관은 법에 따라 사건을 판결합니다. 잘못 판결했으면 그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잘못 판결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면 죽음으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주군께서는 이런 것까지 잘 따져 판결하라고 신을 법관으로 삼으셨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로서 지금 우리 검찰과 사법부의 모습은 어떤가? 오판(誤判)과 오심(誤審)은 말할 것 없고, 법을 마구 함부로 멋대로 사리사욕을 위해 적용하고 판결하고 있지 않은가? 법집행의 가장 기본인 ‘법대로’조차 내팽개치기 일쑤다. 역사는 지금 우리 검찰과 사법부를 최악의 검찰과 사법부로 기록하고 기억할 것이다.
김영수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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