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49) ‘애도하는 게 일입니다’(김민석, 지식의숲)
필자는 그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편집자주>.
2023년 무연고 사망자는 5415명으로 2020년 3136명에 비해 72.7% 증가했습니다. 작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4700만 원, 국내총생산(GDP)는 1조 6733달러로 세계 13위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등의 위기로 실업과 질병, 가족불화와 해체, 빈곤의 대물림이 반복되어 무연고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경향신문, 2024.11. 2).
죽음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한 거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면 죽음에도 불평등이 존재하는 거처럼 보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조사 발표한 ‘2024년 고독사 사망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고독사 사망자 중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비중은 41.4%였습니다(경향신문, 2024.10.17.).
고독사가 늘어난 주요 원인으로 정부는 1인 가구 증가를 꼽고 있습니다. 은퇴와 실직, 가족 해체 등으로 1인 가구는 고립돼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특히 고독사는 50~60대에서 집중 발생하고 있으며 이중 남성 고독사 비율은 전체 고독사의 절반이 넘습니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망자도 14.1%였는데, 이 중 20대 59.5%, 30대 43.4%였습니다. 청년층의 경우, 취업 실패와 실직 등 생계 해결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경기일보, 2024.10.22.).
외신 CNN도 한국의 고독사에 대해 다루면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CNN은 한국 사회의 ‘관계지향적’인 면에 집중했는데, 한국인의 외로움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정의하는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질병으로 진단하고 있는데, 세계보건기구(WHO)도 지난해 외로움을 ‘심각한 건강 위협’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담 위원회를 출범시키기도 했습니다(국민일보, 2024.10.24.).
오늘은 이런 차원에서 ‘애도하는 게 일입니다’(김민석)라는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가인 김민석 씨는 2020년부터 사단법인 ‘나눔과나눔’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캠페인 사업, SNS 관리, 장례이야기 원고 작성 등을 맡고 있습니다(작가 소개).
‘나눔과나눔’은 ‘애도할 권리와 애도 받을 권리’의 보편적 보장을 위해 ‘무연고 사망자’분들의 마지막 순간을 동행하고, 사회적 장례 지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단체입니다. 2011년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을 지키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보면서 이분들의 가시는 길은 누가 지켜드리나 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눔과나눔은 장례상담 및 장례지원, 캠페인 및 교육, 정책제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나눔과나눔 홈페이지, 소개).
필자는 “애도할 권리와 애도 받을 권리”를 ‘애도의 권리’로 보고 이를 ‘보편적 권리’로 보았습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박탈된 애도 등과 같은 개념들을 확인하고,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저자의 논지와 의도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연고 사망자, 편견 그리고 공영장례
무연고 사망자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연고자부터 알아봅시다. 국어사전에서는 연고자를 “혈통, 정분, 법률 따위로 맺어진 관계나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법률이 정한 연고자의 범위는 “배우자, 직계존비속, 부모/자녀를 제외한 직계존비속, 형제자매”입니다. 이를 쉽게 풀어보면, “배우자, 부모와 자녀, 조부모와 손자녀, 형제자매”입니다.
어, 그럼, 내가 사랑하는 조카는 어떻게 되나요? 조카는 연고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가 보통 가족이라고 할 때 가족의 범위와 다르네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족, 가족모임이라며 사용할 때의 가족 범위와 법률에서 정한 가족 범위가 다른 거지요.
무연고 사망자라고 했을 때, 법률이 정한 가족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때도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연고자가 없는 경우(1),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2),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3).
(1)의 경우는 여러 이유로 자기 혼자만 남은 경우, (2)의 경우는 고인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경우, (3)의 경우는 가족관계 단절이나 경제적 이유로 ‘시신처리위임서’를 작성해 ‘거부’를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3)의 경우가 통계상 무연고 사망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연고사망자에 대해 다루고 있는 법률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인데 동법 제12조는 ‘무연고 시신 등의 처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망자의 경우, 보통 사회적으로 죽다, 숨지다, 운명하다, 별세하다, 타계하다 등으로 표현하는데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는 ‘처리되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일요시사, 2022.11.8.).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상당한데, 보통 이런 분들의 경우,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게, 그리고 빈곤하고 안타까운 슬픈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안타깝지만 살았을 때 잘 살았어야지”하거나, “가족들이 문제지. 참, 너무하잖아”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나 말들은 모두 무연고 사망자의 원인을 개인이나 가족에게, 즉 개인적 성향이나 가족과의 단절, 삶의 의지 부족,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나눔과 나눔에 따르면, 고인들은 생전에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고 고인 자신만의 삶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개인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1인 가구의 증가와 같은 가족제도의 변화와 각종 질병의 증가, 장례문화의 변화, 급변하는 사회변화 등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합니다(나눔과나눔 홈페이지, 사회적 장례지원의 필요성).
서울시는 2018년 전국 최초로 ‘서울특별시 공영장례 조례’를 제정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어 오고 있습니다. ‘조례’는 무연고 사망자의 행정 수준을 단순 시신 처리 방식에서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한 장례지원으로 변화시키고 제도화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9년 서울시는 ‘나눔과나눔’과 업무협약을 맺으면서 ‘서울시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오마이뉴스, 2023.8.3.).
2021년 정부는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제를 도입하였고 2022년 기준 전국 82개, 2023년 9월 기준으로는 전국 226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174개(77%) 단체가 조례를 제정한 걸로 조사되었습니다(여성경제신문, 2024. 3. 2).
“일상에 스며든 죽음”
저자는 무연고사망의 경우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와 일상 가까이에서 경험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세 개의 사례를 다루어보겠습니다.
# “어느 챔피언의 죽음”
저자는 고인의 영정을 준비해 제단 위에 올린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인의 친구들에게 빈소가 마련되었다고 알렸습니다. 빈소로 들어온 친구들은 영정을 보더니 모두 믿기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예식과 화장이 끝날 무렵 저자가 친구 한 분에게 조심스럽게 고인이 어떤 분이셨냐고 물었는데, 친구들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지요. 의아하다면서 오히려 저자에게 되물었다고 하니.
“세계챔피언이었던 ***를 몰라요? 이 친구가 무연고로 갈 사람이 아니에요. 은퇴하고 술집도 크게 했거든요.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연고로 가다니.”
세계챔피언을 했고, 은퇴 후에도 술집을 크게 했고,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이 많은 걸 보면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았을 거 같은데,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례를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필자의 경우를 가정해 보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아내에게도 말했지만, 여러 자리에서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내가 가야지, 라는 말을 했습니다. 현재 어머님이 생존하시는데다, 8남매의 막내이고, 결혼을 했으니 내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로 말이지요. 다만, 아내의 뒷마무리는 내 손으로 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서.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니, 어머님도 형님누님들도 저보다 나이가 많다 보니 저보다 먼저 가시게 되면, 아내만 남게 되는데, 아내마저 간 후, 홀로 남은 필자가 사망했을 때는 어떻게 될까? 필자 또한 무연고 사망자가 되어 공영장례를 치르게 될 거 같습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이야기가 필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 삶의 잔금 : 아흔살 노인의 죽음
저자는 아흔이 넘은 고령의 노인을 무연고 사망자로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고인은 미혼이었는데 장례를 치러 줄 가족들이 본인보다 먼저 사망한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너무 오래 산’ 케이스라고 하는. 그런데 공문에 적힌 경찰조사서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답니다.
어느 날 새벽, 고인은 한 아파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시간을 기다린 듯.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 고인은 30분 동안 내려오지 않다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보통 ‘주저흔’이라고 분석하는. 오 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고인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서 하차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아파트 앞 화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노인은 왜 스스로 삶을 마감했을까요? 투신한 사람이라며 보디 백을 풀지도 않고 입관한 탓에 주머니 속 동전이 화장한 유골과 함께 나왔다고 하는데, 폐기하려는 걸 저자는 자신의 사무실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감염병 확산으로 복지관 등 돌봄기관들이 문을 닫아 유례없이 사회적 단절을 경험해야 했던 노인들. 외로움과 고립감을 극복하지 못했을까요.
노인이 남긴 동전들을 보며 저자는, 젊은 사람에 비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스스로 삶을 끝낸 아흔 살 노인의 죽음을 “때 이른 죽음”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 “간병살인”
어느 날 저자는 두 사람의 거주지와 사망지가 일치한 공문을 접하고 잘못 읽은 줄 알았답니다. 담당 주무관이 작성한 특기 사항에는, “사망자는 가족관계증명서상 부부이며 부모 모두 사망하였고, 자녀가 한 명 있으나 사망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일흔이 넘은 부부가 한날한시에 사망하다니?
여러 검색어들을 통해 인터넷을 조사하다 다음의 기사 제목을 확인하였답니다. “70대 노부부 숨진 채 발견 … 남편이 수년간 치매 아내 돌봐” 기사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수년간 돌보다가 지친 남편이 간병살인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사회현상은 이제 흔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자녀를 떠나보냈지만, 그럼에도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왔던 노부부. 그런데 건강하기만 하던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중병을 앓고 있었다거나 큰 사고를 당하는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형제자매도 없고,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않아 건강한 배우자 노인이 아픈 배우자 노인을 돌볼 수밖에 없는 상황.
논의를 좀더 넓혀보면, 요즘 사회적으로 현재의 50~60대를 ‘낀 세대’라고 합니다. 위로는 8, 90대의 노부모를 돌봐야 하고, 아래로는 독립하지 못하고 함께 살고 있는 20~30대 자녀들을 여전히 양육해야 하기에. 심지어 자녀들이 결혼했는데도 함께 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함께 살고 있지 않을 뿐 근처에 살면서 여전히 살림을 자신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결혼한 자녀들까지.
아기라도 낳게 되면 아기 봐주랴, 살림 도와주랴, 맞벌이라도 하면, 손주 양육과 자녀 집안 살림까지. 경제적 이유로 퇴직이 달갑지 않기에, 여전히 노인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노인이라는 이유로 박봉을 감수하면서 일해야 하는 세대.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돌봄’과 ‘양육’의 짐을 벗어 던질 수 없는 세대.
그런데 1인 가구가 늘어가면서 현재의 노인 세대가 가고 자녀 세대가 노인이 되어도 이와 같은 문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1인 가구의 자녀들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겠지요.
“박탈된 애도”
저자와 동료들은 강의를 나가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이런 질문도 받는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돈이 없는데 장례를 치르고 싶다? 그럼, 국가가 해줘야죠. 가족이 없는데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싶다? 그때도 국가가 해 주고요.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사람의 장례까지 치러 줘야 하나요? 그럴 예산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더 도와야 하지 않나요?”
이럴 때 저자는 이렇게 답해준답니다.
“우리 사회가 애도가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죽음에 관한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죽음 이후가 걱정인 사람들에게 공영장례는 우리 사회가 내는 인기척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홀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저자의 이 말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건네는 손길의 ‘최후선’이자 ‘마지노선’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 ‘애도’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거 같습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듭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보고 싶어 연락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면? 그런데 여기저기 알아보니 세상에, 친구가 몇 달 전에 죽었는데, 가족이 없어서, 혹은 가족이 시신 인수를 하지 않아서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다면? 그런데 나는 가족이 아니라서 친구의 부고조차 알 수 없었다면, 나는 친구의 죽음을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을까요?
이를 좀더 밀고 나가, 나는 친밀한 관계에 있음에도 법적 연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인을 위한 장례 준비의 전 과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면?
현재 우리 사회는 가족구조와 변화가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다양한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실천되고 있음에도 혼인, 혈연, 입양 관계만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전에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할지라도 죽음에서 장례까지 이어지는 사후의 과정에서 고인과 맺었던 관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실감과 비통함 속에서 고인을 위해 애도할 권리를 박탈당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박탈된 애도’라고 합니다. “애도의 순간에도 차별이 발생하는 거지요”(일다, 2022.12.22).
박탈된 애도란 “상실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고, 공개적으로 애도할 수 없으며, 사회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을 때 경험하는 애도”입니다. “숨겨진 애도”라고도 하는데, 성소수자의 죽음, 자살유가족, 아기를 유산한 산모, 사랑하는 애완동물의 죽음, 그리고 사회적 재난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서 박탈된 애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형이든 사별을 경험한 유가족들은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애도’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6개월 후가 될지, 1~2년이 걸릴지, 그보다 더 오래 걸릴지. 때문에 애도는 망각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고인을 잊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다시 기억하고, 새롭게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그들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심리적 유산으로 계승하는 거지요. 때문에 박탈된 애도, 숨겨진 애도를 멈추려면 주위 사람들과 시민들이 함께 견뎌주어야 하는 거지요(프레시안, 2023. 6. 3).
스스로 장례를 준비할 수 있을까
저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장례를 스스로 준비하고 싶다는 상담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셀프 장례 상품들’이 있는데, 가족 대신 상조 회사가 장례를 치러주는 건 안 된다고 합니다. 가족 이외에는 어느 단체이든 장례가 인정되지 않으니까요. 고인이 죽기 전에 작성한 ‘사전장례의향서’ 또한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유언장’ 또한 유언의 능력과 내용에 장례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필자 또한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말합니다. 상속을 제외하면, 자신의 의사를 죽음 이후에도 존중받을 방법은 없는데, ‘자기결정권’은 생전에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법률상 가족이 아닌 이가 장례를 치르길 원한다면, 신청서와 함께 몇 가지 증명 자료를 구청에 제출해야 합니다. 그때도 신청자는 무연고사망자가 되어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다는 게 확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청서는 신청자가 사망한 후에야 구청에 접수 가능하니, 사전에 접수 불가능합니다. 사건 사고들이 많다 보니 신청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혈연과 혼인이라는 제도를 넘어 ‘내 뜻대로 장례’와 ‘가족 대신 장례’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답니다. 다행히 2020년 보건복지부에서 ‘장사 업무 안내’에 ‘가족 대신 장례’ 지침을 마련했답니다. 이제 무연고 사망자로 확정된 이후에도 법적 연고자가 아닌 사람들도 장례할 수 있는 길이 허용된 거지요. 하지만 여전히 법률적 한계가 분명하다고 하니, 아직도 갈 길이 멀지요(일다, 2022.12.22).
무결한 삶은 없다: 범죄자에게도 애도의 권리가 있을까
만약 가족이 아무도 없는, 또는 있어도 가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면,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공영장례로 해야 할까요? 저자는 강의를 할 때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던지곤 한답니다. 인신매매범, 가정폭력범, 성범죄자의 공영장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불편함이 자리를 차지하지요. 놀랍게도 저자는 아주 가끔 이런 사람들의 장례도 치렀답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볼까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권리에 차등이 생겨선 안 되고, ‘예외의 존재’를 상정하기 시작하면 그 화살은 결국 약자에게로 향한다. 고인을 애도하는 것은 그의 과거를 옹호하거나 용서해서가 아니다”, “‘무연고’라는 단서가 붙을 때, 고인은 쉽게 ‘타자화’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빈곤하고 외로운,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감정적인 불편함’에 더해 미국처럼 우리 사회도 경제적 불황과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에 따른 ‘사회적 분노’가 높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즐겨 사용하는 ‘가짜뉴스’와 이를 이용한 아군/적군 식으로 편가르는 ‘인민주의적 정치선동’이 난무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어려운 문제이지만, 필자도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범죄자를, 죄인을 옹호하거나 용서해서가 아니라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기본권을 헌정의 “휘선”(brightline)이라 칭했는데, 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기준으로서 보편적 권리”를 의미합니다. 구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이를 “인류보편적 가치”라고 불렀습니다(윤소영 외, 공감)
보통,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게 아니라면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필자는 차이의 인정에 머무르는 게 아닌,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보면, ‘차이의 인정’에도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보편적인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와 나눔과나눔이 지향하는 거처럼, ‘고인에 대한 애도의 권리’가 바로, ‘보편적인 원칙이자 보편적 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백청일(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애도하는 게 일입니다, 김민석, 지식의 숲, 2023.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 (Ⅳ), 윤소영 외, 공감, 2024.
나눔과 나눔, 홈페이지.
더 늘어난 고독사, ‘5060, 남성’이 절반 이상 … 청년층 고독사는 대부분 ‘자살’, 경향신문 2024.10.17.
“무연고사 남의 일 아냐” … 공영장례식장서 본 ‘빈곤의 풍경’, 경향신문 2024.11. 2.
박탈된 애도를 멈추려면 시민들이 함께 견뎌줘야 한다, 프레시안 2023. 6. 3.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⑬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르포, 일요시사 2022.11. 8.
사회적 타살 ‘고독사’, 경기일보 2024.10.22.
서울시의 공영장례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이유, 오마이뉴스 2023. 8. 3.
‘애도의 순간’에도 차별이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장례할 권리가 있는 법적 ‘연고자’의 협소한 범위 개정해야, 일다 2022.12.22.
“한국의 고독한 죽음, 왜?”: … CNN이 분석한 ‘고독사’, 국민일보 2024.10.24.
5,000명 무연고 사망자에 허덕이는 韓 ‘공영장례제’, 여성경제신문 2024. 3.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