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폭하는 ‘한국 보수’, 위기의 ‘민주공화국’

 #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젊은 사람들 위해서라도 우리가 앞장서자’며 계엄군 장갑차 앞에 주저앉던 초로의 여성들. 국회 담장을 넘어가려는 의원을 위해 자신의 등을 내주던 중년 남성.

 본회의장을 사수하려 무장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였던 국회 보좌진. 군경의 위치추적을 우려, 휴대폰을 끈채 황급히 자택을 벗어나 본회의장에 입장한 국회 부의장.

 ‘총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느끼며 계엄군에 맞섰던 국회 여직원. ‘2차 계엄’이 있을 수 있다며 국회 앞에서 밤을 새운 수백 명의 시민들. 그리고 계엄군 진입에 대비, 편집국 문을 잠그고 긴급 호외를 제작하던 광주 언론인들.

 모든 상황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와 유사했으나 단 하나가 달랐다. 그땐 학생들 머리를 박달나무 몽둥이로 깨트리고 길가던 여성을 대검으로 찌르다 급기야 비무장 시민을 향해 실탄을 발사한 공수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북한 게릴라 아닌 민간인을 마주하고 당황한, MZ세대 대북 특수부대 707 특임단이 나타난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을 역사로 배운 분들을 위해 이번 계엄사태를 당시 상황으로 재구성 해보자. 국회에 도착한 계엄군은 불법 내란에 항의하는 시민과 보좌진을 몽둥이로 때리고 칼로 찌른 후 놀라 도망가는 ‘용의자’를 끝까지 추적한다. 그리고 마포와 영등포의 민가 안방까지 군홧발 채 들어가 젊은 사람은 무조건 두들겨 팬 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난다.

 당연히 SNS는 없고 언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스코리아’ 대회를 방송한다. 다음 날 광화문과 영등포, 신촌 로터리 등에서 시민들이 계엄 해제를 외치자 일제 사격을 가해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곧이어 헌법재판소가 인정한 '저항권'을 행사하려는 무장 시민군이 등장하고 방송국 등을 불태운다. 그제서야 계엄사령부는 ‘체제전복을 기도한 불순분자들이 국회 앞에서 폭동을 일으켜 군인 4명 시민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공식 발표한다.

 14일 오후 7시 24분 부로 직무가 정지된, 내란 혐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어법에 따르면 ‘불순분자’가 44년 만에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2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국회 안팎에서 엉킨 계엄군과 시민들, 그리고 보좌진. 만약 계엄군을 태운 헬기가 수방사의 제어 없이 윤석열-김용현 그룹이 계획했던 시간에 도착, 본회의장을 장악했다면? 공포탄과 실탄을 휴대한 계엄군과 보좌진 중 단 한 명이라도 자제력을 잃었다면?

 자칫 엄청난 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 악몽 같던 시간을 윤석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민주당의 폭거를 국민들께 알리고 야당에 경고‘만’ 하려 했다.”

 계엄을 민방위 훈련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나 계엄은 결코 장난일 수 없다. 잠자리에서 튀어나와 계엄 해제 표결에 참석했던 한 여성 의원은 “꾹 참고 있는 얘기가 있어요. 윤석열이 재판에 악용할까 봐…”라며 입술을 깨문다. 한마디로 ‘심신미약’이라는 얘기다. 혹시라도 법정에서 인정되면 감경 사유다.

 # 고려대 국문과 교수였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1960년 고대 4·18의거 직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를 고대신문에 투고,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 시인 막내아들인 조태열 외교장관은 비상계엄 선포 3시간 전 대통령의 긴급 소집에 용산 집무실로 향했다. 대통령이 불쑥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계엄을 반대했다.

 “외교적 파장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지난 70여 년간 쌓아 올린 모든 성취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나의 판단으로 하는 것’이라며 계엄 선포를 위해 일어서자 조 장관은 뒤를 따라가며 재고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날 밤 조 장관은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내용을 가지고 소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을 ‘미스리드’(오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미뤘습니다.”

 당시 초비상이 걸렸을 미 국무성은 골드버그 대사 외에도 각종 공식 비공식 채널을 동원, 윤석열 그룹의 의도와 향후 한국정세를 파악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란 사태 전후 어떤 언질도 받을 수 없었던 미국은 다음 날 아침부터 ‘심한 오판을 했다’는 등 경고 메시지를 발신하기 시작했다. 외교적 수사로선 상궤를 벗어난 이례적 수위였다. 윤석열이 그렇게도 강조하던 ‘한미동맹’의 불협화음이 노골화된 것이다.

 윤석열은 또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에선 2년 이상 한국 내 군사시설들을 촬영한 중국인 3명과 지난달 드론으로 국가정보원을 촬영하다 붙잡힌 40대 중국인 사례를 들었다.

 이에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3일 정례 브리핑에서 불쾌감을 나타냈다. “한국 측 언급에 깊은 놀라움(意外·뜻밖)과 불만을 느끼며 (윤 대통령의 발언은) 중한 관계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에 이롭지 않다.”

 마오닝 대변인은 윤 대통령이 거론한 사건들에 대한 결론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중국산 태양광 시설들이 전국 삼림을 파괴할 것”이라는 윤 대통령 주장에 대해서도 “중국의 녹색 산업 발전은 세계 시장의 수요와 기술 혁신, 충분한 경쟁의 결과”라고 반박했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70여 년 만에 북-러 동맹이 복원된 가운데 그나마 레버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국과의 관계도 냉각될 위험에 처한 셈이다. 중국은 미국의 전방위 외교적 포위 공세를 맞아 최근 한국인의 비자 면제를 결정하는 등 한중 관계 개선에 나선 바 있다.

 # 민주공화국의 한 축인 보수는 10년 남짓 기간에 벌써 두 번의 탄핵을 경험 중이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하차 이후 간신히 ‘탄핵의 강’을 건넜다 이번엔 아예 '죽음의 계곡' 초입에 도착한 것이다.

 분당, 선거 연패 등 궤멸 상태에 내몰렸다 2022년 문재인 정권 검찰총장을 영입, 극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낸 보수 진영. 바로 그 대통령이 자기 진영 한 가운데서 '자살폭탄' 스위치를 당겨버려 다시 벼랑 끝에 선 셈이다.

 설상가상 계파싸움 막도 올랐다. 친윤계 등 주류는 야권에 동조, 탄핵 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친한(동훈)계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있다. 그러나 친한계는 민심을 외면한 이들이 탄핵을 불러온 진범이라는 입장이어서 최악의 경우 8년 전 분당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

   당 주류가 자유투표 대신 굳이 반대 당론을 결정한 배경으로 한동훈 대표 축출 명분을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게 과연 초유의 계엄사태를 맞은 '집권당'의 모습인가.

 보수가 속히 새 인물과 노선으로 환골탈태,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면 대한민국 미래도 어두워진다. 외교 안보와 경제 등 국정 전반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진 가운데 김정은과 친하다는 트럼프 취임도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우리 공동체의 위기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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