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외교 관건은 국내 안정…전쟁을 피하다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계문자의 초상화이다. 
계문자의 초상화이다. 

 청백리로서 계문자는 정치·외교·군사 방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능력은 특히 개혁정치와 그에 따른 정책 방면에서 발휘되었다.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의 그의 능력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먼저 외교적 수단과 방법으로 군사충돌을 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무대에서의 활약은 군사 방면과 연계되어 나타났다. 당시 약소국이었던 노나라는 동남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방의 강국 제나라를 비롯하여 북방의 강국 진, 남방의 강국 초나라와의 외교가 대단히 중요했다.

 대외적으로 당당하게 외교에 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야 한다. 당시 노나라의 실세는 양중(襄仲)과 그 가문이었다. 양중은 기원전 609년 문공(文公)을 죽이고 적장자가 아닌 선공(宣公)을 세우는 정변을 일으켜 노나라 권력을 장악했다. 역부족이었던 계문자는 양중의 행보를 조용히 살피며 기회를 기다렸다.

 계문자는 차분히 정치적으로 명분을 확보하는데 힘을 썼다. 그는 이웃한 거(○)라는 나라의 태자 대자복(大子僕)이 아버지 기공(紀公)을 죽이고 보물 따위를 들고 노나라로 망명해온 사건에 주목했다. 계문자는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사구(司寇)에게 대자복을 내쫓게 했다. 선공을 이를 문책하자 계문자는 태사관(太史官)으로 하여금 해명하게 했는데 그 요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임금에 무례한 자는 작은 새를 잡아 죽이려는 독수리와 같다. (중략) 예의를 저버리는 자를 도적이라 하고 도적이 훔친 물건을 장물이라 한다. 이런 도둑놈 간신을 감싸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중략) 우리가 이런 도적을 감싸고 그 장물을 거두면 우리가 장물아비를 인정하는 꼴이다. 이런 일을 해놓고 백성들에게 뭐라 하겠나? 이 계문자가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간악한 자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기원전 591년 선공이 죽었다. 때를 기다리던 계문자는 조회에서 공개적으로 “우리 노나라가 적장자를 죽이고 서자를 임금으로 세우는 바람에 큰 나라의 도움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이 양중 때문이다!”며 양중을 탄핵했다. 그러자 뜻을 같이 하는 대신들이 나서 양중을 축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로써 양중의 집안은 모두 노나라에서 쫓겨났다.

 이듬해인 기원전 590년 성공이 즉위했고, 계문자를 개혁정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주나라의 적통을 계승한 제후국 노나라 도성 곡부성의 현재 모습이다.
주나라의 적통을 계승한 제후국 노나라 도성 곡부성의 현재 모습이다.

 개혁은 국내 정치의 안정을 기반으로: 계문자의 개혁 정책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외충돌, 즉 전투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통 백성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군사 징발을 비롯하여 군비 충당을 위한 세금을 실제로 부담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정치

 국정 농단 세력인 양중과 그 가문의 제거에서 보여준 뛰어난 전략가로서의 정치력을 보여준 계문자는 다음 단계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토지제도를 비롯한 관련 조세제도에 대한 개혁에 착수했다.

 계문자의 개혁 정책은 양중 세력을 축출하기 전부터 시행되었다. 기원전 594년, 먼저 주나라 건국 이후 500년 가까이 시행해온 ‘정전제(井田制)’를 ‘초세무(初稅畝)’로 개혁했다. 정전제는 100무의 땅을 경작하되 그 중 1/10인 10무를 공전이라 하여 세금 명목으로 경작하게 했다. 물론 토지는 공식적으로 왕전(王田), 즉 국유였다. 그 후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토지의 생산량이 늘었고, 백성들의 수입도 자연 많아졌다. 그러자 권력을 쥔 귀족 등 지배계급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사전(私田)을 대량으로 차지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했다. 이로써 정전제는 유명무실해졌다.

 계문자는 이런 변화에 맞추어 정전제를 폐지하고 사전의 합법성을 인정했다. 대신 땅의 넓이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여 국가의 세수를 확대했다. 이로써 생산력의 발전이 크게 촉진되었다. 이를 ‘초세무’, 즉 처음으로 땅에 세금을 매기는 개혁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봉건제 시작의 표지로 본다.

 기원전 590년 성공이 즉위하자 계문자는 조세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작구갑(作丘甲)’이라 하는데, ‘구’는 지방 기층조직을 가리키고, ‘갑’은 병사를 포함한 군사(軍事, 전차·말·소)를 말한다. 말하자면, 지방 기층조직에 사는 사람들의 토지량에 따라 군사와 관련한 각종 세금을 내게 한 것이다. 이는 ‘초세무’와 연계된 토지개혁이자 세금개혁이자 군사개혁이었다. 그리고 계문자의 이런 개혁은 기원전 589년 제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것으로 그 효력이 입증되었다. 이 전투를 ‘안지전(鞍之田)’이라 한다.

노주공세가에 남은 계문자의 죽음에 대한 평가.
노주공세가에 남은 계문자의 죽음에 대한 평가.

 

 유능함을 경비한 청백리 계문자

 계문자는 기원전 601년부터 기원전 568년까지 30년 넘게 노나라의 국정을 주도하며 선공, 성공, 양공까지 세 군주를 보필했다. 말년에는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슬기롭게 잘 헤쳐 나갔다.

 춘추시대에 대내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실력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명분이었다. 명분이 중요성이 살아 있었던 시대였고, 계문자는 실력을 바탕으로 명분을 확보할 줄 알았던 정치력의 소유자였다.

 노 양공 5년인 기원전 568년 30년 넘게 나라와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해온 계문자가 세상을 떠났다. <노주공세가>에는 그의 죽음과 함께 이런 평가가 남겨져 있다.

 “집에는 비단옷을 입는 아내가 없고, 마구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고, 창고에는 금과 구슬이 없었다. 그렇게 세 국군을 보좌했다. 군자들은 ‘계문자는 청렴하고 충성스럽다’라고 평했다.”

 《좌전》에는 군자의 입을 빌려 “계문자처럼 저렇게 노심초사하면 나라를 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청백리로서 계문자의 진면목을 전하는 이런 일화도 남아 있다.

 중손타(仲孫○)란 자가 하루는 계문자에게 “당신께서는 노나라의 최고 귀족인 상경(上卿)으로서 두 국군을 모시며 재상을 지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처첩은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말은 양식을 먹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당신께서도 이런 저런 물건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라를 위해 생색을 내지 못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계문자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부귀와 여유로운 날을 원한다. 그러나 백성들을 봐라. 거친 음식에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많지 않은가? 그래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처첩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살찐 말을 타면서 어찌 재상 노릇을 하겠는가? 나는 고상한 덕과 지조야 말로 나라를 빛낸다고 들었지 첩의 옷과 살찐 말로 빛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능력과 청렴을 함께 갖춘 청백리, 그것도 군주 다음으로 가장 큰 자리인 재상급 청백리의 존재는 나라의 안정과 위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모든 청백리가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청렴하지 못한 자들에 비하면 당연히 유능했다. 계문자는 이 둘을 겸비한 보기 드문 청백리 재상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사마천은 유능한 재상과 좋은 장수가 한 나라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국유현상양장(國有賢相良將), 민지사표야(民之師表也).”

 “나라의 유능한 재상과 좋은 장수는 백성의 본보기다.”(권130 <태사공자서>)

 전국시대 위기에 처한 조나라를 떠받친 두 기둥이었던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훗날 ‘장수와 재상이 화합’하면 나라가 안정된다는 뜻의 ‘장상화(將相和)’라는 단어를 낳았다. 재상이 한 나라의 안정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역사는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김영수 (사)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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