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한 통치로 복종시키시오. 엄한 것은 그 다음이오”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춘추시대 제후국과 정나라 위치도.
춘추시대 제후국과 정나라 위치도.

 기원전 522년 그가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이제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란 말이냐?”며 통곡했다. 장례치를 비용이 없어 시신을 광주리에 담아 야산에 묻을 것이라는 말이 들리자 백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돈이며 패물을 들고 와 그의 가족에게 제발 후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애원했다. 가족은 이를 사양했고, 그의 시신은 정말로 야산에 묻혔다. 백성들은 가져왔던 돈과 패물을 차마 도로 가져갈 수 없어 그의 집 앞을 흐르던 시내에 던졌다. 햇살에 비친 시냇물은 마치 오색찬란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 시내를 ‘금수하(金水河)’라 불렀다.

 필자는 이 기록을 반신반의했다. 최고 귀족 출신에 20년 가까이 재상을 지낸 그를 장례치를 비용이 없어 그 시신을 광주리에 담아 야산에 묻었다는 대목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의 무덤을 비롯하여 관련한 유적을 찾아다녔다. 금수하는 당시 그 나라의 도성이었던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한복판을 흐르고 있어 금세 찾았다. 그러나 무덤은 몇 년을 찾지 못하다가 2017년 4월, 산 정상에서 찾았다. 봉우리 세 개를 건너 찾았다. 그는 정말 야산에 돌무지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누구인가? 춘추시대 정나라의 정국과 정치를 이끌었던 이 글의 주인공 청백리 정자산(기원전 582~기원전 522)이었다.

 정자산의 생애

 정자산은 사마천이 청백리들의 기록인 <순리열전>에서 손숙오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한 인물이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정자산의 통치 방식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할 서문표 西門豹 편에서 따로 알아보겠다.) 정자산의 정치 생애와 업적 및 청백리로서 그의 모습을 재현해본다.(이하 정자산은 자산으로 약칭)

 중국사에서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두 인물을 꼽는 경우가 많다. 전반기는 관중, 후반기는 자산이다. 관중이 자산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인물이다. 자산의 경우는 혹자는 ‘춘추 후기는 자산 한 사람 뿐’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자산은 춘추 후기 사람이다. 당시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막 개혁에 돌입하던 시기였다. 자산은 이 즈음 태어났고, 할아버지가 정나라의 군주 목공(穆公)이었다. 출신부터 고귀한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족에 비유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아버지가 맏아들이 아니라 군주 자리를 못 물려받았을 뿐이다.

 자산의 나라는 정(鄭)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앞에 붙여 정자산이라 부른다. 위치는 지도를 보면 중국 한복판이다. 오늘날 하남성 지역인데, 다른 말로 중원(中原)이라 부르는 곳이다. 지정학적으로 나라가 강할 때는 사방으로 힘을 뻗칠 수 있지만 나라가 약하면 사방에서 두들겨 맞는 그런 조건이었다. 자산 당시가 그랬다. 북쪽의 진(晉), 남쪽의 초(楚), 동쪽의 제(齊)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산은 정나라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안고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고민과 함께 그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 평생 헌신했고, 그 결과 자산의 삶과 죽음을 더 없이 고귀하게 만들었다.

 정나라는 춘추 초기 3대 국군인 장공(莊公) 때에는 패주로 불릴 정도로 국력이 상당히 강했다. 그러나 5대 때 여공(○公) 이후로 공실과 귀족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져 힘이 빠져 주변 강대국들, 특히 북쪽의 진나라와 남쪽 초나라에게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조진모초(朝晉暮楚)’라는 성어가 나왔다. ‘아침에는 진, 저녁에는 초’로 풀이되는데, 아침에는 진나라 저녁에는 초나라 눈치를 봐야 하는 고달픈 처지를 비유한다.

 할아버지 목공 때부터 자산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드는 여공 때까지, 그러니까 기원전 627년부터 기원전 554년까지 약 70년 동안 정나라는 기록에 남은 것만 33차례 다른 나라의 침공을 당했다. 거의 2년에 한 번씩 얻어맞은 셈이다. 고달픈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정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처지를 ‘구주(九州)의 인후(咽喉)’로 표현하기도 했다. 구주는 천하를 대신하는 표현이고, 인후는 말 그대로 목구멍이다. 인후는 대단히 중요한 부위이고, 이곳을 누르면 숨을 못 쉰다. 그만큼 요충지이면서 힘이 없으면 다른 나라가 이곳을 눌러 꼼짝달싹 못하게 된다는 의미다. 바로 이런 나라, 이런 상황에서 왕조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산이 태어났다.

 자산의 삶을 편의대로 우선 연대순으로 정리해서 제시하고, 이어 그 중에서 중요한 사건과 정책 등을 좀 더 설명하는 방식으로 청백리 자산의 모습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자산이 태어난 정나라의 옛 성벽 유지인 정한고성(鄭韓古城).

 연대순으로 정리한 자산의 삶 

 * 기원전 582년(정 성공成公 3년, 노 성공 9년) 1세

 - 정나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자국(子國)으로 정 목공(穆公)의 아들이다.

 * 기원전 578년(정 성공 7년, 노 성공 13년) 5세

 - 정 공자 자반(子班)이 자인(子印), 자우(子羽)를 죽임. 자사(子駟)가 국인을 이끌고 공자 자반과 손숙(孫叔) 등을 죽임.

 * 기원전 571년(정 성공 14년, 노 양공 2년) 12세

 - 6월, 정 성공이 죽고 자운(子○, 희공 僖公)이 즉위함. 자한(子罕)과 자사가 국정을 맡고, 자산의 아버지 자국(子國)이 군대를 이끄는 사마(司馬)가 됨.

 * 기원전 566년(정 희공 5년, 노 양공 7년) 17세

 - 정 희공이 무례하여 충고했으나 듣지 않음. 자사가 밤중에 희공을 시해하고 제후들에게는 병으로 죽었다고 알림. 희공의 아들 가(嘉)를 세우니 간공(簡公)으로 당시 5세였음.

 * 기원전 565년(정 간공 원년, 노 양공 8년) 18세

 - 4월, 정의 여러 공자들이 자사가 간공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자사를 죽이려 했다. 자사는 이를 구실로 자호(子狐), 자희(子熙), 자후(子侯), 자정(子丁)을 죽였다. 손격(孫擊), 손악(孫惡)은 위(衛)로 달아났다. 자국과 자이(子耳)가 채(蔡)를 침입하여 채의 사마 공자 섭(燮)을 잡으니 국인이 모두 기뻐했다. 오직 자산만이 아버지 자국을 만나 차분히 책임을 따졌다.

 * 기원전 563년(정 간공 3년, 노 양공 10년) 20세

 - 정의 재야인사들인 귀족 위지(尉止), 사신(司臣), 후진(後晋) 등이 자사의 전권에 불만을 품고 10월 아침 서궁을 습격하여 자산의 아버지 자국을 비롯하여 자사, 자이를 죽이고 간공을 북궁으로 옮겼다. 자산은 병사를 이끌고 북궁을 쳐들어가 위지 등을 죽였다. 자공이 국정을 담당하여 전권을 기록에 남기고 휘두르려다 대부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반대파들을 죽이려 했으나 자산은 “여러 사람들의 분노는 건드리기 힘듭니다. 전권을 휘두르기 힘듭니다”라고 충고하여 기록을 불태웠다.

 * 기원전 544년(정 간공 22년, 노 양공 29년) 39세

 - 자전이 죽고 자피가 이어서 상경이 되었다.

 - 오나라 공자 계찰(季札)이 정을 방문하여 자산을 만났다. 계찰이 자산에게 “정나라의 권력이 틀림없이 자산에게 돌아갈 것이니 삼가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정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 기원전 543년(정 간공 23년, 노 양공 30년) 40세

 - 7월, 백유가 정권을 쥐고 멋대로 굴다가 사대(駟帶)에 의해 살해되었다. 사대가 자산을 공격하자 자피가 이를 말리며 “예의는 국가의 기둥이다. 예를 갖춘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환란을 없다”며 화를 냈다. 자피가 집정했다.

 - 자피가 자산에게 정치를 맡겼다. 자산은 ‘작봉혁(作封○)’으로 대변되는 토지개혁 등 개혁 정치를 실행했다. 자산이 집권한 지 1년 만에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게 하니 국인들이 그를 칭송했다.

 * 기원전 542년(정 간공 24년, 노 양공 31년) 41세

 - 10월, 자산이 간공을 보좌하여 진에 갔으나 진은 노 양공의 죽음을 핑계로 접견하지 않았다. 자산이 숙소의 담장을 허물고 마차를 몰아 진입하게 했다. 진 대부 사문백(士文伯)이 자산을 꾸짖자 자산은 엄중하게 진의 무례함을 비판했다. 진 국군이 연회를 열어 간공과 자산을 초청했다. 대부 숙향이 “자산이 외교 사령을 잘 하니 제후들이 그 덕에 이익을 보겠구나”라고 했다.

 - 12월, 정나라 사람들이 향교에 모여 자산의 정치를 두고 수근거렸다. 대부 연명이 향교를 헐자고 건의하자 자산은 일축했다.

 - 자치가 윤하로 하여금 봉읍을 관리시키고자 자산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자산은 “높은 자리와 큰 봉읍은 자신을 비호하는 수단이 됩니다. 저는 배운 다음 비로소 관직을 맡을 수 있다고 들었지 관직을 맡은 다음 공부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기원전 538년(정 간공 28년, 노 소공 4년) 45세

 - 9월, 자산이 ‘작구부’로 조세 제도를 개혁하려 하자 국인들 일부가 이를 비난했다. 이에 자산은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생사를 그 일과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듣기에 좋은 일을 하려면 그 법도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라고 반박했다.

 * 기원전 536년(정 간공 30년, 노 소공 6년) 47세

 - 3월, 자산이 형법을 청동기에 주조한 ‘형서(刑書)’를 만들어 대중에게 공표했다. 진의 대부 숙향이 자산에게 편지를 보내 비판하자 자산은 답장을 보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 기원전 529년(정 정공 원년, 노 소공 13년) 54세

 - 자산, 자태숙이 정공을 도와 평구(平丘)에서 회맹했다. 공물의 부담을 논의하면서 자산은 제후들의 등급에 따라 공물을 차등있게 내자고 강조했다. 논의는 저녁이 되어서야 진후가 승낙함으로서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자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는 끝났다. 나를 도와 일할 사람이 없어졌으니. 오직 그 만이 나를 이해했다”며 곡을 했다. 회맹 중 자산의 행동을 두고 공자는 “나라의 주춧돌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칭송했다.

 * 기원전 526년(정 정공 4년, 노 소공 16년) 57세

 - 3월, 진의 집정 한기(韓起)가 정을 방문하여 옥환(玉環)을 요구했으나 자산이 완곡한 말로 거절했다 한기가 상인에게 옥환을 억지로 사려다가 자산에게 비난을 당했다.

 * 기원전 524년(정 정공 6년, 노 소공 18년) 59세

 - 5월, 비조의 예언대로 네 나라에 화재가 발생했다. 비조가 다시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자산은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깝다.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다. 비조가 천도를 어찌 안단 말인가. 말이 많다보면 어쩌다 적중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일축했다.

 * 기원전 523년(정 정공 7년, 노 소공 19년) 60세

 - 여름, 정나라에 수재가 발생했다. 용이 성문 밖에 연못에서 싸운다는 소문이 들렸다. 국인이 재앙을 피하기 위한 제사를 요구했다. 자산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용이 보지 못하는데 용이 싸우는 것을 왜 우리가 봐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용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으면 용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라며 제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 기원전 522년(정 정공 8년, 노 소공 20년) 61세

 - 자산이 병이 깊어지자 자태숙에게 “내가 죽으면 당신이 집정하여 덕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관대한 통치로 백성들을 복종시키시오. 엄하게 대하는 것은 그 다음이오”라고 당부했다. 공자는 이를 두고 이렇게 칭찬했다. “오! 정치가 관대하면 백성은 게을러진다. 게을러지면 엄격함으로 바로 잡는다. 엄하게 다스리면 백성이 다친다. 백성이 다치면 관대함을 베푼다. 이렇게 관대함과 엄격함을 잘 조화시켜 병용하면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된다.”

 - 자산이 죽자 공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인자함과 사랑은 고인의 유풍이다”라고 애도했다.

 김영수 (사)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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