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뒤안길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양반 빨갱이”라 불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정해룡(1913~1969)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논란이 많은 존재다.
그가 “양반”이자 “빨갱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적 위치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격변과 그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이 당시의 사회적 관념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정해룡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쳐 해방 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가 “양반”이라고 불린 이유는 그의 출신이 전통적인 조선의 양반 가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라남도 보성 봉강리에서 조선시대 명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성 정씨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보성 일대에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였지만 춘궁기와 흉년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애민 정신을 실천하며 덕망 높은 명문가로 알려졌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대규모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종들을 해방시키며 평등과 공동체적 가치를 실천했다.
또한 1937년에는 보성에 사립학교 ‘양정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농민 자녀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며 민족교육에도 헌신했다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그런 그가 “빨갱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다소 복잡하다.
그는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 운동가이자 이후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정해룡은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따르며 건준(건국준비위원회) 활동에 참여했고, 이후 근로인민당에서 중앙위원 겸 재정부장을 맡아 통일운동에 힘썼다.
그는 좌우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 통합을 꿈꿨으며, 이를 위해 우익 세력과도 협력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
때문에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극단으로 갈리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당시 시대의 요구에 맞춰 사회주의적인 길을 걷던 이상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겐 그의 활동이 국가를 위협하는 ‘적’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한국 전쟁 후에는 그가 속한 진영과 그가 지지했던 이념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그의 친척 중 일부가 북한에 협조하거나 빨치산 활동에 가담하면서 그의 일가는 간첩 혐의를 받아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1980년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으로 그의 가족 30여 명이 체포되고, 아들 정춘상은 1985년 사형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해룡은 왜 ‘양반 빨갱이’ 평가를 받았을까?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라는 억압적인 상황에서 독립운동은 단순히 이념을 넘어서는 생존의 문제였다. 그러나 해방 후,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그가 택한 길은 결국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지지한 이유는 당시 그에게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지지했던 이념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와 결합되었고, 이는 곧 반공의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그를 ‘빨갱이’로 낙인찍게 했다.
누군가의 삶, 그 역사적 배경 이해해야
그의 이름을 들으면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양반이라는 신분과 동시에 그가 걸었던 정치적 길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과연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였을까, 아니면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인물이었을까?
그를 단정짓는 것은 어렵다. 다만, 그가 살아온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되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결국 ‘양반 빨갱이’라는 타이틀은 단순한 폄하가 아닌, 그가 살아온 시대와 갈등의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는 상징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해룡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역사와 그 속에서의 이념적 충돌,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사회적 갈등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그러니 정해룡을 ‘양반 빨갱이’라 칭하며 그의 삶을 논할 때, 우리는 단순히 한 인물의 과오를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가 살아간 시대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정해룡을 다룬 책이 지난해 나왔다. ‘정해룡 평전’(문영심 지음)이다.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김봉철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