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52) 봄바람, 박상률
봄!
많은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새봄이 왔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 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봄’은 사계의 첫 번째 계절이면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요. ‘봄바람’도 그렇습니다. 봄에 부는 계절풍이지만, 인간, 인생, 정치, 경제, 역사, 사회에 연결시키면 그 의미는 무한대로 넓어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사랑을 하고, 인생을 알게 될 때쯤, “봄이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마침,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기도 합니다.
인생에서 봄바람을 처음 맞이하는 사춘기에는, 여러 경험을 통해 이제 인생을 알 거 같기도 하고, 어른 흉내를 통해 어른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기도 하고, 무언가 나만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봄바람’은 어른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자녀들을 지켜보면서,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홀로 또는 둘이 남았을 때도 어김없이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왠지 모르게 새로운 기대를 하게 되고, 무언가 새로 만들어 가고 싶은 의지가 막, 샘 솟고, 막연하지만 분명 실체가 있는 듯한 희망을 들뜨면서 꿈꾸게 되고, 지나버린 추억을 다시 불러와도 그때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합니다. ‘봄바람’이 주는 선물.
오늘은 사춘기에 접어드는 한 소년의 성장을 다룬 소설 ‘봄바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흔히 사춘기를,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며 지내던 시기에서 보이지 않던 내면의 세계에 눈 떠가는 시기라고도 합니다. 주인공 훈필이는 열세 살 섬마을 아이인데, 학년으로 치면 초등 고학년에서 중학생으로 진학하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훈필이의 모습에서 어른이 된 ‘나’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갱년기를 지나고 있거나, 또는 갱년기 전후인 어른들이 훌쩍 커버린 ‘또 다른 훈필이’인 ‘현재의 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갱년기’는 ‘제2의 사춘기’라고도 하니, 수많은 어른이 훈필이처럼 ‘봄바람’을 맞으며 마음 설레이기도, 새로운 희망과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계절 출판사에서 몇 해 전 30여 년 동안 출간했던 어린이청소년 도서 중 10편을 엄선해 ‘YOLO’ 선집을 새로 내놓았는데 그 안에 ‘봄바람’도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뿐 아니라 어른들도 깊고 널리 공감할 수 있는,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도서입니다.
에피소드 하나.
젊은 시절 입시학원을 병행하던 논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필자가 ‘봄바람’ 발문을 만들고 있었는데, 지나면서 이를 지켜보던 입시학원의 역사선생님이 아는 체를 했습니다.
“그 책 주인공이 훈필이 아닌가?”
“맞아요, 읽어보셨어요?”
“읽었지. 훈필이 모델이 나야.”, “예?”
“상률이형이 그러더라고. 내 이름에서 ‘필’을 가지고 와서 지었다고.”
“우와, 그럼 선생님이 모델인 거에요?”
그냥 웃기만 하셨습니다. 책 뒤에 있는 발문을 쓴 정호승 시인이 “훈필이는 작가의 또 다른 내적 자화상”이라고 한 걸 보면, 작품은 아마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다만, 필자가 아는 역사선생님도 모르긴 몰라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봄바람이 불면, 떠나는 사람들
어른들은 봄바람이 불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서 들이나 바다로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 / 그런데 봄이 되면 정말로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조용히 농사일을 배우던 머시마와 가시나들. / …. 그들은 뒤주에서 퍼낸 보리쌀 몇 되를 읍내 사전이나 풀빵 집에 맡겨 여비를 마련해서 봄바람을 타고 떠나 버린다. …. / …. 봄바람을 탄 그들은, 한동안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우리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짐한다. 언젠가는 나도 이 마을을 떠나리라!
작품의 시작입니다. 섬마을,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농사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환경,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순종적으로 “조용히” 농사일을 잘 배우고 있는 아이들, 어느 날 야반도주하듯 섬을 떠나는 머시마와 가시나들, 그런 선배들을 선망하면서 떠날 걸 다짐하는 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작품의 배경을 간략하게 서술한 후 ‘나’, 훈필이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
“서늘한 그리움”은 ‘꿈’을 꾸게 하고
훈필이네는 가정 형편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훈필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사는 “온 식구가 매달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 봐야 겨우 입에 풀칠하고 나면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
그래서 훈필이는 염소 한 마리를 기르는 중입니다. 학교에 갈 때 풀이 많은 곳에 말뚝을 박아 염소를 매어 놓은 후에 학교가 끝나 해질 무렵이면 염소를 데리러 산으로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공회당 앞 확성기에서 지지직, 거리는 라디오의 잡음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노래. 훈필이는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되집어봅니다.
“시원한 밀짚모자, 포플라 그늘, 양 떼, 목장의 아가씨, 연분홍빛 입술, 널따란 푸른 목장 …. / 그 어느 것 하나 내 손엔 잡히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훈필이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게 있습니다. “서늘한 그리움”. “서늘함”과 “그리움”이 공존할 수 없는 듯 보이지만, 공존이 가능한데 이를 ‘역설’이라고 부르지요. 마치, “외로운 황홀한 심사”(정지용, ‘유리창’)처럼.
떠나 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며 보내는 이 밤이 외롭지만, 차가운 유리창에 입김을 호호, 불면, 성에가 끼어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죽은 아들의 모습인 거 같아, ‘마음이 혹하여 달뜬 상태’가 되어, 아들을 자꾸 보고 싶은 마음에, 또, 호호, 불게 되는 아버지의 마음.
‘외로움’과 ‘황홀함’이 공존할 수 없어 보여도, 우리 삶에서는 공존이 가능한데, 이것은 ‘역설’이라는 문학적 기법 때문이 아니라, 문학적 기법을 통해 현실의 역설성이 드러난 거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훈필이가 느끼는 “서늘한 그리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양떼”, “목장의 아가씨” 등은 “내 손엔 잡히지 않는 것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훈필이입니다. 이성의 ‘서늘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니까요. 그럼에도 ‘보고 싶고 애타는 마음’인 ‘그리움’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니, 이런 복합적 감정을 “서늘한 그리움”이라는 표현으로 역설적으로 드러낸 거겠지요.
이런 감정을 느껴서일까요? 동시에, 훈필이는 은주와 농업 고등학교를 떠올립니다. 농업 고등학교를 나오면? 목장을 하나 차리면? 은주와 결혼을 하면? 한가롭게 목장을 둘러보면서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고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상상의 힘은 상상 그 자체이기도 하니.
산으로 올라가는 훈필이의 다리에 힘이 들어갑니다. 염소를 더 잘 돌보아서 어미염소를 키워 새끼를 늘려야지, 그럼 중학교도 갈 수 있고, 고등학교도 갈 수 있고, …. 훈필이가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계절의 틈 사이에 외로움이”
숫기가 없는 훈필이는 은주를 좋아합니다.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만의 비밀.
어느 날, 학교가 끝나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난 친구들과 원두막 아래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늦게 들어온 은주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좁은 원두막 안이 비좁아 개구쟁이 아이들이 은주를 약올립니다. 보다 못한 훈필이가 한소리 한 후, ‘은주신랑’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훈필이 딴에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이제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훈필이는 학교가 파하고 산에서 염소를 데리고 풀을 먹이면서 코스모스 꽃들로 꽃다발을 만들어 은주네 사립문 앞에 걸어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주는 훈필이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운할 만도 합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한 여학생이 전학을 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피부색과 옷차림, 말투. ‘서울 아이’에게 관심도 없던 훈필이는 은주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커져갈 때쯤, 푸른 목장의 아가씨는 햇볕에 그을린 은주보다 뽀얀 피부의 서울아이가 더 어울릴 거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염소를 돌보다 들꽃을 한아름 꺾어와서 이파리를 따고 가지런히 고른 다음 신문지에 곱게 싸서 다음 날 이른 아침 집을 나섭니다. 등교하는 친구들을 만날까 걱정하지만, 길거리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습니다. 읍내 학교 근처에 있는 서울아이 집 앞을 어슬렁거리던 훈필이는 개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던 서울아이에게 들키게 되고, 생일선물이냐고 반겨하는 서울아이에게 얼떨결에 꽃다발을 건네 줍니다.
내면에서 커져만 가는 비밀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친구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비밀. 그럴수록 훈필이의 마음 한쪽에 ‘외로움’이 커져갑니다. 또래보다 웃자란 탓에 생겨버린 외로움. 그런 마음을 달래려 괜히 집을 나와 골목을 거닐다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은주네 집 앞에 서게 됩니다.
아, 이럴 수가! 자신이 만들어 걸어 논 코스모스 꽃다발이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체 아직도 그곳에 있”습니다. 은주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으리요,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럼에도 묘한 서글픔이 가득 밀려옵니다. 비로소 훈필이는 ‘외로움’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열 세 살의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계절의 틈에서, 그 틈 사이엔 외로움이 있다는 걸 알아야만 했다. …. 사람 속에서 살지만 나는 어쩌면 사람 속에서 살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 부모님, 친구들, 학교선생님, 어느 누구하고도 나는 속을 터놓고 지내지를 못한다. 이미 비밀이 많아져 버려서 나 자신을 아무에게도 속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비밀일기장’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대개 여학생들이 많은데, 이것도 시간이 흐르니 비밀일기장이 아닌, 다이어리나 수첩에 그냥 ‘낙서’를 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더’ 흐르니, 예전이면 비밀일기나 낙서장에 쓸 내용들을, 수업 시간 글쓰기 시간에 시나 생활글로 속 시원하게(!) 쭈~욱, 써 내려갑니다.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글 쓴 후 발표시간을 갖고 다른 학생들에게 반드시 ‘좋은 점만’ 하나 이상씩 피드백 하게 하는데, 그런 글을 발표할 때는 필자도 그렇고, 듣고 있던 아이들도 숙연해집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학생들이 썼다는 글 모음집에 실린 글 이상으로 가슴 아프고, 감동적인 글들. 모든 학생들이 그런 내면의 상처와 힘듦, 스트레스, 막막함과 답답함을 이겨내면서 사는구나, 하는, 마음 짠하면서도 성숙함이 느껴지는 글들. 그런 글을 대할 때마다 “참, 감동스런 글이다. 근데, 이건 샘이 피드백 하기가 좀 미안하다”고 한답니다.
엄마, 아빠에 대한 여러 감정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난 글, 기대라는 무게에도 날마다 힘들게 할 수밖에 없다는 글, 하기 싫어도 그래도 해야 하지 않느냐며, 그래도 어떨 때는 하루는 놀기만 하면 좋겠다는 글, 진로를 바꾸고 싶은데 뒤처질 듯한 두려움에, 지금까지 해 온 게 아까워서 그냥 하게 된다는 글 등. 모아서 묶어 책으로 내도 수십 권이 나올 거 같은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훈필이와는 또 다른 ‘비밀’과 ‘외로움’을 간직한 수많은 ‘훈필이들’. 해마다 ‘훈필이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니, 이것도 큰 축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건들’ 속에서 ‘가출’을 하게 되고
세계문학처럼 어린이청소년도서 중에서도 나중에 ‘고전’이 될 거 같은 책들이 있고, 또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으면서 ‘현대판 고전’이라 평해지는 책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봄바람’도 출판사에서 ‘YOLO’ 시리즈로 엄선해 새로운 디자인으로 출판하였으니 이미 객관적으로 어린이청소년 도서의 ‘현대판 고전’으로 평가를 받은 거죠.
‘독서일기’에서는 독자 스스로 일독하면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이후 더 자세한 내용은 삼가려고 합니다. 다만,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 훈필이가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가출’을 결심하면서 집을 나갔다 다시 돌아왔다는 흐름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두 가지 사건! 어른이 읽어도 참으로 가슴 아프고 공감이 되어 훈필이의 가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출하는 과정은 또 왜 그리도 읽는 이의 공감과 심사를 뒤흔드는지, 어린 시절 ‘나’ 또한 그러했던 모습들이 참으로 많았다는 점에서 진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출한 훈필이가 마주친 어른들은 또 왜 이런 모습이고 저런 모습인지. 얄팍하고도 폭력스러우면서도 또 어느 곳에서는 따뜻한 손길도 있는 세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뿐 아니라 어른으로 성장하면서도, 그리고 지금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허, 참, 훈필이에게서 영락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뒤로 밀려난 만큼 앞으로 내달은 것이니”
6학년을 마감함으로써 시리고 아렸던 내 열세 살의 지난 1년은 과거의 일로 밀려갔다. 그러나 열세 살의 세월이 뒤로 밀려갔으면 사실은 그 열세 살만큼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밀려간 그만큼 앞으로 내달은 것이리라.
훈필이는 열세 살의 지난 1년 동안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과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과거의 일로 밀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훈필이는 곧바로 “뒤로 밀려갔으면 그만큼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훈필이는 어린 나이에도 세상의 이치이자 진리를 깨달은 거지요.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는 법이니, 변방의 늙은이의 고사 ‘세옹지마’를. 앞으로 훈필이는 새로운 꿈을 꾸겠지요.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본다!
뒤를 ‘돌아본다’는 건 뒤를 ‘본다’는 것과 다르고, 앞을 ‘내다본다’는 건 앞을 ‘본다’는 것과 또 다릅니다. ‘돌아보고’ ‘내다보는’ 행위는 서늘한 정신으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꿈’으로 연결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 말이지요.
사춘기 시절에 꾸었던 꿈은,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서 사라지거나, 폐기되거나,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성을 띠게 되거나, 변화하기도 합니다. 그 꿈은 직업이기도, 사랑이기도, 행복한 미래이기도, 자녀이기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신념이기도,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에 대한 지향이기도 합니다.
다만, 어른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은데, 나이만 먹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꿈꾸기’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었다거나, 이 정도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 자신의 지난 과정은 금칠에 버금가게 포장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강압으로 돌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훈필이를 옥죄었던 수많은 어른의 모습이 나에게서도 나타나게 되지요.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고,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고도 합니다. 그걸 ‘과정으로서의 삶’이라고도 하지요. 사춘기라는 인생의 첫 관문을 통과하면 앞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관문이 버티고 있다는 걸 어른들뿐 아니라 수많은 ‘훈필이들’도 알고 있겠지요.
수많은 관문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흘러가는 강물에게 이유를 물을 수 없듯이 우리의 인생을 ‘과정’으로 볼 때, 하루하루, 사건들과 사건들을 회피하지 않고, 주어진 지금의 이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겠지요. 이 책이 어른들을 위한 도서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백청일(논술학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