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야소하(成也蕭何), 패야소하(敗也蕭何)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유방은 한왕에 봉해져 한중으로 들어가 오도 가도 못하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지형과 지세가 그랬다. 더욱이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항우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잔도를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이곳을 나가 관중으로 진입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에 앞서 말한 대로 도망병이 속출했다.
한중으로 들어온 유방을 따라 합류한 사람 가운데 한신(韓信)이 있었다. 그는 당초 항우의 군대에서 병사(의장대) 노릇을 하다가 기원전 206년 ‘홍문연’을 계기로 유방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방은 그를 치속도위(治粟都尉)로 삼았지만 그 자리 역시 군량과 말 먹일 풀을 관리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재상 소하는 우연히 한신의 진면목을 알아 본 하후영(夏侯○)의 소개로 한신을 만났다.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눈 뒤 소하는 한신이야말로 정말 얻기 힘든 인재라고 판단하여 그를 유방에게 추천했다. 유방은 생각이 달랐던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소하의 추천을 피했다. 소하는 “인재가 있어도 모르고, 인재가 있는 것을 알고도 쓰지 않고, 쓴다고 해도 중용하지 않으면 어찌 인재들을 끌어 모을 수 있고 큰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충고했다.
한편, 한신은 유방 밑에서도 앞날이 여의치 않음을 직감하고 다른 곳에 몸을 맡길 결심을 했다. 어느 날 새벽을 틈타 한신은 행장을 꾸린 다음 말을 몰아 유방의 진영을 빠져나왔다. 보고를 받은 소하는 깜짝 놀라 유방에게 보고조차 않고 부하 몇을 데리고 동문을 나가 한신의 뒤를 쫓았다.
“천하를 얻으려면 한신 없이는 안됩니다”
점심 무렵 소하 일행이 한 마을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이 한신은 벌써 30, 40리는 더 갔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소하는 피로도 아랑곳 않고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뒤를 쫓았으나 한신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소하는 포기하지 않고 달빛을 따라 계속 뒤를 쫓아 마침내 한계(寒溪)라는 시냇가에서 한신을 만났다.
* 소하: 한 장군, 우리는 첫 만남부터 의기투합하여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인데 어째서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떠나십니까?
* 한신: 재상의 은혜는 정말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왕이 저를 쓰려 하지 않으니 제가 거기 남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소하: 제가 다시 한 번 한왕께 한 장군을 대장군에 임명하게끔 추천해보겠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한왕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도 장군을 따라 떠나겠소!
한신은 소하의 진솔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다시 유방의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이틀이나 소하의 얼굴을 보지 못한 한왕 유방은 소하가 도망친 줄 알았다. 그러다 한신을 뒤쫓아 갔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버럭 화를 내면서 “도망간 장군이 열은 넘는데 어째서 한신만 뒤쫓았는가?”라고 다그쳤다.
소하는 “장군감은 찾기 쉬워도 능력 있는 장군감은 찾기 힘듭니다. 한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인재(국사무쌍國士無雙)’입니다. 대왕께서 한중(漢中)에만 둥지를 틀고 있으려면 한신을 기용하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 천하를 얻으시려면 한신 없이는 안 됩니다!”라고 단언했다.
이어 소하는 군사와 정치 형세에 대한 한신의 남다른 견해들을 유방에게 일일이 소개하면서 한신을 중용하지 않으면 자신도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소하의 적극적인 추천에 마음이 움직인 유방은 마침내 한신을 궁으로 불러들여 바로 대장군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하는 이를 말리면서 “대장군을 임명하는 일은 큰일이니 정식으로 날짜를 택해 장엄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한신에 대한 신임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렇게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대왕의 마음을 충분히 표명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 것 아닙니까?”라고 건의했다.
유방은 소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커다란 단을 세우게 한 다음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식을 거행했다. 그 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는 결정적인 전투는 거의 모두 한신이 지휘한 결과였다.
인재가 인재를 알아본다고 했다. 훌륭한 인재라면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사심 없이 추천할 줄 알아야 한다. 소하는 일찌감치 한신의 자질을 간파했으나 유방은 머뭇거렸다. 소하는 강경한 태도로 유방을 설득했고, 마침내 한신을 대장군으로 발탁하게 만들었다.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재 하나가 승부를 가름하는 관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훗날 초한쟁패에서 한신이 보여준 결정적 역할은 소하의 눈이 정확했음을 여실히 입증했다. 인재라고 확신한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잡아야 하며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이후 ‘소하가 달밤에 한신을 뒤쫓다’는 ‘소하월하추한신(蕭何月下追韓信)’ 고사는 인재를 알아보고 기어코 인재를 모신다는 전고가 되었다. ‘월하추한신’ 또는 ‘소하추한신’으로 줄여서 쓰기도 한다.
‘추천하기도, 제거하기도’ 이중적 소하
대장군에 임명된 한신은 유방에게 한중을 나갈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불태운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여’ 항우 진영의 경계를 늦춘 다음 바로 관중(關中)으로 나가는 입구인 ‘진창을 몰래 들이치자’는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渡陳倉)’의 계책을 냈다. 한신의 예상대로 항우 진영은 이를 비웃으며 전혀 경계를 하지 않았고, 한신은 진창을 기습하여 마침내 한중을 나왔다.
이후 초한쟁패의 형세는 급변했고, 한신의 대활약으로 유방은 열세를 뒤집고 끝내 천하를 다시 통일했다. 그러나 막강한 병권을 가진 한신은 유방에게 작지 않은 위협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여태후에게 한신이 진희(陳○)와 더불어 반란을 꾀한하려 한다고 밀고했다. 여후는 한신을 소환하려 했으나 오지 않을까 두려워 소하와 상의했다. 여태후는 소하의 말에 따라 황제의 명령이라고 속여 “진희가 이미 죽었고, 신하들이 모두 와서 축하를 올리라”고 했고, 소하는 한신에게 “아프더라도 억지로 들어와 축하를 올리라”라 했다. 한신이 입조하자 여태후는 그를 잡아 장락궁(長樂宮) 종실(鐘室)에서 목을 베었다. 이어 한신의 삼족까지 없앴다.
이렇게 보면 한신을 추천한 사람도 소하였고, 한신을 죽게 만든 사람도 소하였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성공도 소하, 실패도 소하’라는 뜻의 ‘성야소하, 패야소하’라는 말이 나돌았다. 누군가의 일이 한 사람에 의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상은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고 그를 적극 추천했는가 하면, 정권의 안정을 위해 잠재적 위협이 되는 그 사람을 제거한 소하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달리 보자면 권력자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소하의 처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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