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54)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자료를 몇 개 읽어봤더니요, 후보들마다 서로 찬탄, 반탄 나뉘어서 싸우던데요?”
“아니야, 이번에 전당대회에서 반탄측 후보들만 결선투표에 올라갔잖아? 선생님, 대통령이 탄핵이 되었는데도, 국민의힘은 진짜 개혁이 안 되는 거에요?”
“강○○ 장관 후보에 대한 갑질 의혹이 심해서 민주당 보좌진협의회 역대회장단에서도 비판성명을 냈잖아요. 근데, 자료 찾다 보니 이제 민주당에서 그 보좌관들을 색출한다고 하는 기사도 있던데, 이거, 마녀사냥 아니에요?”
“조○이랑 윤○○이랑 사면했던데요, 그럼 이제 조○은 대통령 나오는 거에요? 위안부할머니들은 어떻게 돼요?”
반들은 다르지만, 중고등부 신문만평스크랩 발표 시간에 학생들이 했던 질문 중 몇 개를 추려서 다소 거친 표현들을 순화해보았습니다. 초등부는 신문에 나온 사진을 스크랩해서 발표하게 하고, 중고등부는 초등부와는 수준이 달라지기에, 만평을 스크랩해서 발표하게 합니다. 신문사마다 만평을 담당하고 있는 작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그날 발생한 몇 개의 사건을 재구성해 풍자와 날카로운 비판을 한 컷의 만화에 담아냅니다.
학생들은 숨은그림찾기처럼, 화가가 만평에 숨긴 의미들을 읽어내기 위해, 만평스크랩 준비와 발표를 하다 보면, 자료조사능력을 기르게 되고, 대립되는 신문사의 기사들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기를 수 있고, 만평에 숨겨진 상징과 반어, 풍자 등을 읽어내는 읽기 능력/문해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다 보니, 쓰기 능력도 기를 수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으로, 만평을 고를 때 매주(또는 2주),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른쪽 신문(조선, 중앙, 동아, 한국, 매경 등)과 왼쪽 신문(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을 번갈아서 고르도록 합니다. 한쪽 신문들에 나온 만평만 계속하다 보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자료조사를 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 시각에 치우칠 수 있다고 주의를 줍니다.
청소년 시기에 할 일은 어느 한 쪽에 단단히 서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를 찾아내고, 자료들을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 내고,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서술하면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끊임없이 받는 일입니다. 긍정적인 피드백 과정을 거치지 않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불장군’이 되기도 하는데, 간혹, 그런 청소년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전 중2 학생이 이미 ‘한쪽에 단단히 서서’ 정치 비평과 세계 흐름을 ‘다소 걱정스러울 정도로’ 확고하게 발언하고, ‘어떤 피드백도 수용하지 않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대단한 어른이 있나 보다, 생각하면서도,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에 충실해야 했기에, 늘 비교하게 하고, 다른 쪽 입장에 대한 의견을 던져서 폭넓게 생각하게 했는데요.
돌아보면, 그럼에도, 이미 열혈당원이나 되는 거처럼, 확고한 자세와 태도가 결코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에도 문제점이 있음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제기되는 문제들에는 여러 이유를 대며 (실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 논리로) 합리화하고, 다른 쪽 입장을 항상 비판만 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저 뛰어난 능력을 이렇게 쓰는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래서 신은 공평하다고 하나, 하는 씁쓸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발표 후 서로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데, 선생님도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내용은 선생님이 보충 설명을 하거나 간략한 브리핑을 해서 학생들 배경지식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 목적이 있겠지만, 학생들이 물어보면,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 줘야 된다는 마음으로 날마다 포털 뉴스에 올라온 뉴스들과 심층 뉴스들을 찾아서 읽고 있는데, 학생들이 선생님을 공부시키는 과정이지요.
그런데 학생들이 만평 발표 후, 선생님에게 물을 때, 초등부와는 다르게,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부끄러움을 자주 느낄수록, 이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평에서 작가들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필자의 모습이기도 하고, 어른으로서 이런 세상이 되도록 무얼 했나, 하는 자책감도 들어서. 그러다 보니, 답변이나 설명을 할 때, 흑흑, 나도 어른으로서(때로는, 사교육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로 미안하다, 흑흑, 하는 진반농반으로 시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은 고 박완서 작가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고인이 되신 박완서 작가의 문학사적 업적에 대한 글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문학동네’에서는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세트’를, ‘세계사’에서는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을 출간하여 작가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1974년도(신동아)에 발표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제목을 검색하면 제목을 차용한 수많은 칼럼과 관련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발표된 지 50여 년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와 이 시대의 부끄러운 모습이 많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필자에게는 이문열 “책 장례식”으로 알려진 사건 때 고인이 하셨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책 장례식”은 작가 이문열이 썼던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 시론에 한 시민운동가의 주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 작가가 사는 동네에 찾아가 “이문열씨 책은 독극물, 10원에 팔겠다”라는 책 반환행사였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책들을 관 형태로 묶어 ‘운구’하고,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문열 작가의 책 표지사진을 ‘영정’처럼 들려 모의 장례식을 진행하였던 사건(조선일보, 2001.11.4.).
진보와 보수, 그 어느 쪽에서도 감히 나서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던 폭력적 분위기. 이런 분위기에 ‘소신 발언’을 한다면, 중국 문화혁명기처럼 ‘고깔모자’를 씌워 창피를 주고, ‘대중의 공적’으로 몰아 작가생명, 교육자생명, 공직자생명 등 사회적 신분과 관계를 박탈했을 것입니다.
2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도 똑같은데, 좌표찍고, 신상털고, 가족털고, 온갖 프라이버시를 털어, 인터넷 조리돌림과 망신주기, 창피주기, 문자공격, 직장과 집 찾아가기, 일상생활 불가능하게 만들기 등 중세의 마녀사냥보다 더 끔찍한 ‘현대판 마녀사냥’이 진행될 겁니다.
그때 박완서 작가는, 문단의 원로이자 한 명의 작가로서 인터뷰를 자청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문학이 모독 당하는 일이 생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문열씨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에겐 최소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수많은 문학 단체의 침묵은 또 뭡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 하는 사람들의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동아일보, 2001.11.22.).
살다 보면, 어떤 글귀가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장이 되기도 합니다. 필자에게도 많은 문장이 있는데, 그중 고인의 인터뷰는 늘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문장입니다. 그런 채찍질이 작가의 작품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 똑똑이 새겨져 있는 거 같습니다. 필자는 남대문의 상징과 부끄러움, 희망을 핵심어로 하여 작품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대문의 상징
주인공 ‘나’는 전쟁이 벌어지자 어머니를 따라 동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바퀴가 불안전하게 탈탈거리는 손수레에 피난 보따리와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태우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번갈아 밀며 끌며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본 폐허의 서울.” “해 안에 한강도 못 건너겠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나’는 마지막으로 서울을 눈에 담아두고 이제 앞만 보고 가야겠다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때 남대문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 왔다.”
아름답고 웅장했던 남대문, 정다우면서도 거대하고 준엄해 ‘나’를 압도했던 남대문. 생사의 기로에선 피난길에 오르는 ‘나’에게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남대문은, 그러나 이후 그 의미를 잃게 됩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 또한 “번번이 딴 데로 한눈을 파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남대문은 “이미 오래전에 이 고장의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번번이 딴 데로 한눈을 파느라 놓치고 말았다. …. 나는 이미 이 고장이 남대문의 정기 따위가 지배할 고장이 아니란 걸, 남대문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이 고장의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됐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대상의 의미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이 둘을 둘러싼 환경, 상황, 조건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게 볼 때 ‘나’와 남대문이 놓인 전후 서울의 거리, 환경, 조건은 아수라장이었던 피난길에서도 남대문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던 ‘나’의 감각을 무신경하게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대문이 작품의 서두에 배치된 건 남대문의 의미 변화가 사회의 변화상을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입니다. 이후 부끄러움 많던 ‘나’의 변화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 많던 ‘나’는 환멸 속에 가두어지고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조그만 실수에도 부끄럽다든가 창피하다든가 하는 생각도 미처 들기 전에 얼굴부터 빨개졌고, 얼굴이 달아 오르는 열기를 의식하자 하찮은 일에 큰 죄나 진 것처럼 얼굴이 빨개지고 마는 내 변변치 못한 성품이 싫고 부끄러워 한층 얼굴이 빨개지면서 엉망으로 쩔쩔”매던 아이.
내 부끄러움은 실수한 경우에만 그러는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잘한 일에 칭찬을 받아도 얼굴이 빨개졌고, 친구들의 시기, 질투를 의식해 교실에서는 소설책만 보고, 집에서 밤을 꼬박 새워 공부했는데 최고 득점자로 이름이 불리면 “내 흉물스러움이 만천하에 폭로된” 거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이러한 감정/감각은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기에 ‘나’는 “까진 피부를 보호” 하듯 “늘 얌전하고 말썽 안 부리는, 눈에 안 띄는 모범생” 생활을 하였습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나’의 가족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었습니다. 불규칙한 무상배급은 “먹고 또 먹어 대는” 동생들 때문에 “밑 빠진 가마솥”이었고, 그때부터 어머니는 “이 웬수 같은 놈의 새끼들”이라며 아이들을 흠뻑 두들겨 패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전생의 원수 쳐다보듯 삿대질하던 무서운 어머니, 악머구리 끓듯 하던 동생들의 울음소리를, ‘나’는 지금도 끔찍한 “지옥도의 한 폭”으로 기억합니다.
하루 온 종일 동생들과 먹을 만한 풀을 찾아 굶주린 짐승처럼 들과 산으로 돌아다니던 어느 날, 동네에 산 너머에 부대가 생겼다는 소문이 돕니다. 미군 부대였습니다. 그 후 피난민과 원주민이 3 대 1인 마을에 이상한 활기가 돌았는데, 그건 “육기나 기름기가 아니라, 느글느글한 화냥기”였습니다.
타관에서 양색시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동네는 기지촌으로 변해갔습니다. 화장하고 파마하는 아가씨들이 늘어가더라도 먹고 살기 힘든 피난민 딸들이 양색시가 되는 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난과 굶주림으로 비참의 극을 겪던 어머니가 파마를 하고 요상스런 화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을 풀어헤치고 온몸을 드러낸 채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누구도 찾아주지 않은데, 너 때문에 “우리 식군 다 굶어 죽었다”고.
“나는 무서워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순간 내 내부의 부끄러움을 타는 여린 감수성이 영영 두터운 딱지를 붙이고 말았을 게다. 제 딸을 양갈보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그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생존’ 앞에 ‘부끄러운 감정’은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니 이후 ‘나’는 부끄러운 감정에 두꺼운 딱지를 붙이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윤식 교수는 이를 “현실에 대한 환멸감이 부끄러움의 감정을 대체”해 버렸다고 분석합니다.
그 후 ‘나’는 시집을 갔는데, 이혼 후 두 번 더 결혼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시골의 부자라 일컬어지는 집의 후취로. 하지만 아기를 낳지 못해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은 돈, 명예보다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어떤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지방 대학 강사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속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비겁하고, 거짓말쟁이에, 순 엉터리”였습니다. 자기 전공 공부에는 게으르면서 자신 없는 주제에 지방신문에 잡문을 쓰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던, “비비 꼬인 남자.”
세 번째 남편은 소문난 장사꾼이었습니다. “철저한 배금주의를 조금도 위장”하지 않는, “한밑천 잡아 잘살아 보자”는 신조를 가진 남자.
그러다 보니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서울생활을 하면서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고 허둥지둥하다가 우두망찰”하게 되었습니다. ‘나’가 신호등 건너는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신호등을 건너면 “덩달아” 건넜는데, 그것도 “건너지 않아야 할 길을 몇 번”이나.
“그러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한 뒤죽박죽의 상태에 있는 건 나 자신이었다. 바쁜 길을 가다가도 건널목의 신호등에 푸른 불이 켜져 사람들이 일제히 건너는 것을 보면 나는 건널 필요가 없는데도 덩달아 건넜다. …. 그렇게 건너지 않아야 할 길을 몇 번 덩달아 건너다 보면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고, 그날의 할 일조차 입고, 촌닭처럼 서투르게 허둥지둥하다가 우두망찰을 했다. 꼭 뭣에 홀린 듯 신나는 분주 끝에 오는 절망적인 우두망찰.”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정신차려라”,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냐?” 라고 말합니다. 정신을 놓은 모습이기 때문에. 이때 정신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걸,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합니다.
정리해 보자면, ‘나’는 ‘부끄러운 감정’을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여기고 ‘두터운 딱지’를 붙이고 살다 보니, 중심을 잡아야 할 ‘정신’이 ‘현실에 대한 환멸감’에 휘둘려, 결국 방향을 상실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거지요.
‘부끄러움’을 깨닫게 되니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고위직 남편을 둔 친구 경희가 다니는 일어학원에 나가게 된 ‘나’는 어느 날 학원 길거리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야박스럽고, 경망스럽고, 교활하고, 촌티까지 더덕더덕 나는” 일본 관광객들과 대비되게 한국 여자 안내원은 “경제 제일주의 나라의 외화 획득의 역군답게 다부지고 발랄하고 긍지에 차”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 안내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렸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노 - 미나사마, 고치라 아타리카라 스리니 고주이 나사이마세(저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 / ….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안내원을 욕할 수도, 안내원의 말을 인정할 수도, 무시할 수도, 방관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나는 아닌데, 라며 화를 낼 수도 있고, 나는 아니지, 떳떳한데, 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안에 ‘나’가 느낀 종류의 ‘부끄러운 감정’이 없다는 거입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생존이란 이름으로 변명하고, 여전히 사치스러운 감정이라 치부하거나, 반대로 나는 아니라는 두꺼운 철판으로 봉인한 채.
안내원의 말은 제우스의 번개창이 되어 두꺼운 철판을 박살 내니 자유를 찾은 부끄러운 감정이 얼마나 격렬하게 /뿜어져 나왔을지. 그것을 ‘나’는 ‘고통’이라고 표현합니다. “환희롭게”, “자랑”으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만평 발표를 하던 학생들의 질문과 답변이 끝나고 나면, 궁금한 게 더 있으면 묻게 하면서 보충 설명을 하는데, 이때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나/우리의 잘못은 너/상대의 잘못에 비하면 큰 게 아니다. 나/우리는 큰일을 하고 있다(또는 대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우리의 잘못은 죄라고 할 수 없다.’
좌우 가리지 않고, ‘대의가 있으면 작은 잘못이 되고, 결국 정당화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상식이 되고, 이걸 지적하면 마녀사냥을 당하는 분위기에 대해서, 여전히 여러 자료를 조사하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평가해보면서도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주의를 줍니다.
글을 쓰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주인공 ‘나’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한다면, 필자만의 오판일까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후안무치’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끄러움을 덜고, 덜고 또 덜고 살다 보니 어느새 얼굴이 두꺼워진 사람. 예전에 만났던 ‘이미 한쪽에 단단히 선 채 어떤 피드백도 수용하지 않던’ 중2 학생처럼.
하지만 많은 학생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고 싶어 하고, 새로운 걸 알고 싶어 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걸 ‘희망’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청일(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완서, 고교생과 함께 하는 김윤식 교수의 소설 특강, ㈜한국문학사, 2002.
박완서, “문학이 모욕당해야 하는가”, 동아일보 2001.11.22.
‘이문열 책반환’ 모의장례식, 조선일보 200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