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과 유능함, 지혜까지 겸비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청백리로 평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은 당연히 청렴(淸廉)이다. 여기에 유능(有能)까지 갖추면 금상첨화이다. 여기에 개인의 성품으로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직언할 수 있는 강직(剛直)을 보탠다면 거의 완벽한 청백리라 할 수 있겠다. 청렴함과 유능함은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좋은 정치와 정책으로 나타난다. 강직함은 조정의 기풍과 권력자의 처신을 올바른 쪽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서한 무제(武帝) 때의 청백리 예관(기원전 약 169~기원전 103)은 전례가 없는 가혹한 법집행으로 악명을 떨친 혹리(酷吏)들 사이에서 보기 드물게 선정(善政)을 펼친 청백리였다.
역사상 청백리가 귀중한 까닭은 혹리나 탐관들이 판을 치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직자라면 백성과 나라를 위해 어진 정책을 베풀며 헌신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학(苦學)의 날들
한 무제 중기에는 몇 차례 큰 규모의 대 흉노 전쟁이 터졌다. 전쟁으로 인한 무거운 부담은 통치계급과 백성 사이의 모순을 격화시켰다. 대상인과 토호 세력들은 이 틈에 전국 각지에서 토지를 강탈하는 등 제멋대로 설쳤다. 게다가 이런 토호 세력을 다스리기 위해 나타난 혹리 정치도 이들과 잔인함과 가혹함을 서로 경쟁하듯 했다. 이 때문에 억울하고 잘못된 사건들이 터져 나왔고, 그 재앙의 종착지는 하층 백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에 선한 정치로 백성을 교화하기로 이름을 남긴 예관이 있었다. 그는 좌내사 벼슬을 하면서 해박한 법 지식과 실무 능력 및 관리로서 지켜야 할 기강을 갖추고 활동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농업을 권장하고 형벌을 완화했으며, 자신의 몸을 낮추어 인재를 대우했다. 그는 말 그대로 봉건사회 청백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예관은 천승군(千乘郡) 천승현(지금의 산동성 고청현 高靑縣 동남 고원성 高苑城) 출신이다. 그는 ‘문경지치(文景之治)’로 불리는 서한 왕조의 전성기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문경지치’는 한 문제가 즉위한 기원전 180년부터 그 아들 경제가 세상을 떠난 기원전 141년까지 40년 간을 말한다.
예관의 생애는 대체로 경제가 재위했던 기원전 157년부터 기원전 141년과 겹치며, 무제 통치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예관의 청년 시기는 무제 통치기로 서한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참고로 무제는 기원전 156년에 태어나 15세인 기원전 141년에 즉위했다. 무제 즉위 때 예관은 20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무제는 야심이 큰 통치자로 안팎으로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사상과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기원전 104)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를 제외한 모든 학파와 사상을 내쳤다. 역사에서는 이를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 한다. 이로써 무제는 유가의 사상을 유일한 통치사상으로 확립했다. 무제는 후속 조치로 유가의 경전을 전문으로 강술(講述)하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다. 무제는 이를 통해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했다. 예관도 바로 이 길을 선택했다.
예관은 아주 힘든 고학의 과정을 거쳤다. 일찍이 유가 경전의 하나인 《상서(尙書)》를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이름난 유생인 구양생(歐陽生)의 지도를 받으며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내 박사로 뽑혔다. 이어 유학의 대가인 공안국(孔安國 생졸미상)을 따라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연구했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 중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미천했던 예관은 동문들을 위해 밥을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계와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그는 노동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쉬는 시간에 책을 읽었다. 뼈를 깎는 이런 노력은 예관의 굳센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 힘든 생활과 유가사상의 훈육은 훗날 벼슬살이에서 백성의 교화에 중점을 두었던 예관의 정치사상을 형성하는 뿌리가 되었다.
험난한 벼슬살이 끝 찾아온 기회
공부는 뜻을 가진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다. 예관은 마침내 중앙정부의 사법부 최고 자리인 정위(廷尉)를 보좌하는 녹봉 100석의 졸사(卒史)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러는 그는 막 들어선 이 벼슬살이가 사회로부터 싸늘한 대우를 받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정위는 이름난 혹리 장탕(張湯·~기원전 115)이었다. 그는 엄격한 법집행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혹리였고 그 아래 부하들도 대부분 이런 경향이었다. 유생으로 이런 조직에 끼어들었으니 별다른 직무도 받지 못한 채 문서조차 다루지 못하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예관은 변방의 군인 북지로 발령이 나서 장탕 개인을 위해 가축을 치는 일을 맡았다.
몇 년 뒤 예관을 장탕의 정위부로 돌아왔지만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의 벼슬살이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한 번은 무제가 장탕이 처리한 사건의 문서를 검토하다가 의문이 들어 다시 써오라고 내려 보냈다. 장탕의 부하들이 여러 차례 수정해서 올렸지만 무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예관은 자진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직접 보고서를 수정해서 담당자에게 올렸다. 예관의 문장을 본 담당관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감탄했다. 초조해하던 장탕은 이를 보고받고 뛸 듯이 기뻤다. 장탕은 예관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늦게 알게 된 것을 한탄했다. 보고서를 무제에게 올라갔고 무제는 그 자리에서 바로 비준했다.
며칠 뒤 무제는 장탕에게 직접 보고서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예관이란 이름이 나오자 무제는 “내가 일찍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지”라며 감탄했다. 장탕은 바로 예관을 보고서를 담당하는 발탁하여 크게 아꼈다. 예관을 법에 담긴 의미에 근거하여 해결되지 못한 사건을 판결했다. 이로써 그저 중형으로만 처벌하던 긴장된 사회적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예관의 법집행과 정치적 재능이 발휘되었고, 무제는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예관은 유가에 호감을 갖고 있는 무제와 수시로 유가의 경학을 토론했다. 특히 나라를 안정시키는 치국방략을 주제로 하는 《상서》를 강론하여 확실히 무제의 눈에 들었다.
예관은 바로 황제의 고문 역할을 하는 중대부로 승진했다. 기원전 113년에는 다시 좌내사(左內史)로 승진했다. 이로써 예관은 중앙 조정에서 주요 정책을 논의할 수 있는 비중 있는 자리에 올랐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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