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공정 단호히 지킨 말단 관리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청백리의 삶은 고단하다. 역사가 생생하게 보여주듯 청백리의 일생은 고난이 대부분이었고, 또 그 때문이겠지만 그 수 또한 극소수였다. 청렴을 평생 지키기가 그만큼 힘들었다. 여기에 청렴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영명한 통치자까지 만나야 한다. 정권과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더 힘들다. 간신과 탐관이 설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청백리는 청렴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개인의 고상하고 굳은 의지에다 자신이 모셔야 하는 권력자까지 잘 만나야 한다.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된 봉건 왕조체제에서는 청백리의 비율이 더더욱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사 5000년을 통해 성군(聖君)이나 명군(明君)은 고사하고 평범한 군주를 만날 수 있는 확률도 그리 높지 않았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씨 조선왕조 518년 동안 모두 27명의 왕이 있었다. 이 중 명군은 몇이나 되며, 그저 평범한 왕은 또 얼마나 될까? 청백리의 존재가 귀중한 까닭이 이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금이다. 오늘날 민주화된 공직 사회에 과연 청백리로 부를 수 있는 공직자는 얼마나 있을까?
청렴을 지켜내는 힘
청백리 윤옹귀(?~기원전 62)는 서한 중기 하동 평양(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남) 출신이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는 불행을 겪었다. 가난한 집안 환경에다 숙부에 의지하며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책을 읽고 문장을 썼으며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예도 뛰어났다. 출신이 낮아 출세는 바랄 수 없었고, 현의 감옥에서 말단 관리로 일했다. 윤옹귀는 젊은 시절을 실의의 나날로 보냈다.
윤옹귀는 소제(昭帝) 통치기(기원전 86~기원전 74)에 살았다. 직전 황제였던 무제는 야심이 큰 군주로 안팎으로 큰일들을 많이 벌였다. 그 결과 전례 없는 업적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나라의 곳간이 바닥이 나서 백성들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전성기의 등 뒤에 큰 위기가 잠복해 있었다. 무제는 만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가혹한 폭정과 무거운 세금을 금지하여 농업 생산을 회복시켰다.
소제는 일곱 살 어린 나라에 즉위했다. 대사마 대장군 곽광(○光, ?~기원전 68)이 무제의 유언에 따라 어린 황제를 보좌했다. 무제의 뜻에 따라 경제를 회복시키려 무던 애를 썼지만 무제 때 두드러지게 출현했던 지방의 토호세력들은 여전히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 이들은 법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실권을 쥔 곽광과 그 친인척들, 심지어 그 집안의 식객과 노비들까지 마구 설치며 난리를 피웠다. 곽광의 위세에 눌린 지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어떤 자들은 직권을 이용하여 도리어 백성들을 쥐어짰다.
당시 윤옹귀는 시장을 관리하는 작은 벼슬에 있었다. 그는 이에 맞서 시장을 어지럽히는 곽 씨 집안의 양아치들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곽 씨 집안사람들은 겁을 먹고 윤옹귀에게 감히 대들지 못했다. 말단 관리의 용감한 일처리에 사람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윤옹귀를 칭찬했다.
윤옹귀는 결코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했다. 상인의 선물이나 뇌물은 단호히 거절했다. 다른 관리들과 격이 다른 윤옹귀에게 상인들은 두려움과 함께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당당한 답변과 인연
얼마 뒤 윤옹귀는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우연한 기회에 윤옹귀는 자신의 능력으로 중앙 조정으로 진출하는 숙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 사람과의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윤옹귀가 귀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동군(河東郡, 산서성 서남부) 태수 전연년(田延年)이 평양으로 시찰을 나왔다. 전 태수는 전국시대 제나라를 통치했던 전 씨의 후예로 법 집행이 엄격하고 지방 토호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행적으로 조야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전 태수는 능력 있는 인재들을 모아 자신의 조수로 삼으려 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 전 태수는 벼슬을 지낸 전직 관리를 60명 가량 직접 불렀다. 윤옹귀도 불려나갔다. 전 태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지방에서 벼슬을 지냈다. 지금 하동에 토호 세력들이 나라의 명령도 따르지 않으며 설치면서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조정에서는 인재를 목이 마른 듯 찾고 있고, 본관도 이에 맞추어 너희들 중에서 능력 있는 인재를 골라 기용하려 한다. 이제 문장력이 있고 시문을 잘 짓는 사람은 동쪽에 서고, 무예와 병법을 공부한 사람은 서쪽에 서도록 하라.”
이어 전 태수는 한 사람씩 각자의 재능을 시험했다. 이렇게 수십 명을 문무의 재능에 따라 동서로 나누어 세웠다. 윤옹귀의 차례가 되었지만 윤옹귀는 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도 묻는 말에 답하지도 않았다. 전 태수가 이상하게 여기며 까닭은 물었다.
윤옹귀는 “저는 문무를 모두 갖추었기에 어느 쪽에 서야 할지를 몰라 이렇게 엎드려 있습니다”라고 했다. 윤옹귀의 답은 주위를 모두 놀라게 했다. 모두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부러움의 눈길도 있었고, 경멸의 눈길도 있었다.
태수의 사무장 같은 자리인 공조(功曹)는 윤옹귀가 불손하고 주위의 관심을 끌어 돋보이려 하는 자라고 여겨 기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태수는 윤옹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어 단독으로 그를 불러 여러 가지를 물었다. 윤옹귀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민첩한 판단력과 탁월한 정견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문장도 뛰어났다. 전 태수는 그 자리에서 윤옹귀를 녹봉 100석의 졸리(卒吏)로 삼아 자기 부서로 데려왔다.
엄격한 법집행, 성과내고 태수로 승진하다
윤옹귀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전 태수는 이런 윤공귀를 깊이 신임하여 중용했다. 심지어 윤옹귀가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여길 정도였고, 오래지 않아 태수의 중요한 참모나 마차가지인 독우(督郵)로 승진시켰다. 윤옹귀는 하동군의 남부 10개 현을 맡아 다스렸다. 여기서 윤옹귀는 법정한 법집행으로 성과를 냈다. 특히 불법을 일삼는 현의 관리들과 토호 세력을 뿌리 뽑는 데 탁월한 성적을 올렸다.
그의 일처리는 진지하고 꼼꼼했다. 행여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치밀하게 두 번 세 번 조사했다. 이 때문에 그에게 벌을 받는 사람조차 원망할 수 없었다. 그의 명성은 날로 조야를 울렸다. 몇 년 윤옹귀는 청렴과 치적으로 후지위(○氏尉)로 발탁되었고, 곧 이어 군승위(郡丞尉) 등과 같은 벼슬을 거쳤다.
어디를 가든 어떤 벼슬에 있든 윤옹귀는 남다를 성과를 냈다. 그 뒤 다시 홍농도위(弘農都尉) 등 요직을 거쳐 기원전 74년 선제(宣帝)가 즉위한 다음에는 마침내 동해군(지금의 산동성 담성(○城 북쪽)의 태수가 되었다.
김영수 (사)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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