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억 아니라, 현재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경주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세간의 기대를 모았던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북미 정상회담은 결국 불발로 그쳤다. 그리고는 곧장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뒤 처음으로 미국은 독자적 대북제재를 발표했고 북한이 이에 반발하면서 다시금 북미 간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다.
11월 4일,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사이버 범죄와 정보기술(IT)노동자 사기 등 북한의 다양한 불법 공작을 통해 발생한 자금 세탁에 관여한 개인 8명, 기관 2곳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무부도 3일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를 위반해가며 북한산 석탄·철광석의 대중국 수출에 관여한 제3국 선박 7척에 대해 유엔 제재 대상 지정을 추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의 독자 제재 및 유엔 제재 추진은 특별히 새로운 움직임은 아니지만 이번 제재의 시점은 특별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APEC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하는 기간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간곡하게(?) 여러차례 밝혔음에도 결국 북한의 답을 듣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무반응에 대한 트럼프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는 언론의 분석도 나름 일리가 있어보이고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제재 카드도 활용하겠다는 분석 또한 일리가 있어 보인다.
美 독자 제재 폭탄에 北 미사일로 ‘초강경 반발’
그런데 트럼프의 회동 제안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북한은 미국의 제재 조치에 대해서는 즉각 반발하였다. 11월 6일 북한 외무성 김은철 미국 담당 부상은 ‘우리 국가에 끝까지 적대적이려는 미국의 속내를 다시금 확인한데 맞게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라는 제목의 담화를 통해 “미국의 악의적 본성이 또다시 여과 없이 드러났다. 새 미 행정부 출현 이후 최근 5번째로 발동된 대조선 단독제재는 미국의 대조선 정책변화를 점치던 세간의 추측과 여론에 종지부를 찍은 하나의 계기”라며 “현 미 행정부가 상습적이며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또다시 변할 수 없는 저들의 대조선 적대적 의사를 재표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압박과 회유, 위협과 공갈로 충만된 자기의 고유한 거래방식이 우리 국가를 상대로 언제인가는 결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미련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며 미국의 대북 제재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우리의 대미사고와 관점에 아무러한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은 7일 평안북도 대관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 한 발을 발사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APEC 직전인 10월 22일 이후 16일 만이며, 이재명 정부 출범 후 두 번째이다.
북미 정상 간의 만남이 불발된 이후 미국의 제재와 북한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당분간 북미 간 대화의 접점을 찾기는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전과 같이 미국과의 대화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이번 미국의 제재를 보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아예 절연하겠다는 입장을 더욱 확고하게 가져가는게 아니냐는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반발이 북한 외무성의 실무진 담화 정도로 머물렀고,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은 계속 열어두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북미 간의 이같은 상황과 관련하여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미 간 회동은 결국 불발됐지만 만남을 대비한 물밑에서의 동향은 확인됐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 시 김정은과 만남 의향을 표명한 상황에서 대화 여지를 감안해 최선희 외무상의 방러 출국을 막판까지 고심했던 게 포착됐다”며 “국정원은 김정은이 대미 대화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향후 조건이 갖춰지면 미국과 접촉에 나설 것으로 판단한다”고 국회 정보위원회는 전했다.
국정원은 향후 북미 관계에 대해 “북미 정상 회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며 “북한에서 미국 내에 있는 국제 및 대북 일꾼들과 여러 지도적 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최근 들어 많이 축적하고 있는 것을 하나의 증거로 보고 있다”고도 전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은 내년 3월 진행될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거론하며 “3월이 정세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내년 3월 정세 분수령, 대화 가능성 여지 있어”
여하튼 최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북한의 대외전략과 국제 정세는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일방주의적 정책으로 인한 국제 규범의 붕괴와 미·중·러의 전략 경쟁의 가속화 그리고 한국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하는 ‘두 국가론’으로의 북한의 국가전략 전환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내외적 상황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지 5개월이 지나가지만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동과 북한의 전략 변화의 폭과 깊이에 제대로 대응해 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민주진보진영 내에서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비록 이러한 진단이 불편하더라도 이제 한번 쯤은 차분히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현 정부의 대북 정책팀은 무너진 남북 관계를 다시 세워 본 경험들이 있고, 과거의 경험은 여전히 큰 자산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질서 전환기에는 그 한계도 분명하다. 2019년 평창과 평양 그리고 판문점에서의 감동적인 ‘기억’과 ‘합의’를 다시 복원하자는 주문과 비핵화를 위한 북미대화에 대한 기대만으로는 남북 관계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지금의 소극적 평화 일상과 그 연속적 가능성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안된다. 소극적 평화는 불안정하고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짜 평화는 아주 천천히 올 것이다. 상대방이 적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행위들을 자제해 나가면서 호응을 유도하고, 신뢰의 폭과 깊이를 차츰 확대해 나가는 인내의 과정이 아직은 더 필요하다.
특별히 이번 북미 정상회동 불발을 일회적인 해프닝으로 넘기지 말고 그 배경과 북한과 미국의 의도를 면밀히 살피고 향후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진전을 위해 어떤 새롭고도 담대한 전략과 정책을 취해야 할지 고심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누구 말대로 북한에 미국과 대화하라고 촉구하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닐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우리의 담대한 전략 전환이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믿음과 함께….
강영식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