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불급사(言不及私)’의 동해군 태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태수로 부임하기에 앞서 윤옹귀는 정위(廷尉) 우정국(于定國)의 관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우정국은 그 권력이 막강했다. 창읍왕을 폐하고 선제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거듭 승진을 거친 조정에서 가장 잘 나가는 요인이었다. 공교롭게 우정국의 고향이 동해군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두 사람의 고향 후배를 윤옹귀에게 추천하여 윤옹귀의 도움을 받아 작은 벼슬이라도 받길 원했다.
윤옹귀가 인사를 온다는 보고를 받은 우정국은 두 사람을 뒤채에서 기다리다 윤옹귀에게 인사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먼저 윤옹귀를 만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당시 우정국은 자신의 권세와 위세를 단단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윤옹귀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 그러나 윤옹귀는 대화 중에서 ‘사적인 일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언불급사言不及私)’ 그저 어떻게 하면 동해군을 잘 다스릴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한나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윤옹귀는 두 젊은이를 만나보기조차 원치 않았다. 윤옹귀는 권세를 두려워 않는 사람이었다. 아부할 줄도 모르고 원칙을 굳게 지키며 직무에만 충실한 윤옹귀의 태도와 자세를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윤옹귀가 물러나자 우정국은 두 젊은이에게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윤 태수는 정말이지 정말 얻기 힘든 나라의 인재다. 그는 공을 앞세우고 사사로움은 완전히 잊은 사람이다. 모든 일을 오로지 조정과 사직을 위할 뿐이다. 너희들이 윤 태수를 모시고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혹여 동해군에 가더라도 사사롭게 일을 꾸미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거라”고 당부했다. 우정국은 정말 윤옹귀의 인품에 탄복했다.
동해태수로 근무하는 동안 윤옹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법도를 엄격하게 밝혔다. 성실하게 지역을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해냈다. 그는 늘 미복을 하고 민정을 시찰하여 꼼꼼히 살폈다. 이 때문에 각 현의 백성들의 민생은 물론 범죄자와 관련한 일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지역에 해를 끼치는 탐관과 토호 세력들의 죄상을 상세히 기록하여 공문서로 보관한 다음 처리할 일이 있으면 이 증거를 바탕으로 단호히 판결하여 그들과 결탁하여 죄를 저지르려는 일당들을 확실하게 방진했다.
일벌백계 ‘범죄와의 전쟁’
윤옹귀는 범죄 예방과 해결을 위해 남다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중대하고 긴급한 범죄 사건이 있으면 일부러 느긋한 태도를 취해 범죄자를 방심하게 만들고, 그들이 경계심을 늦추면 증거 기록에 따라 바로 체포한 다음 그 죄상에 따라 법으로 단호히 처벌했다. 윤옹귀의 ‘범죄와의 전쟁’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남다른 방법이다. 즉,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관리들이 대체로 가을에서 겨울 사이 각지의 관리들이 집중되어 있을 때나 각 현을 순시할 때 활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이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작용을 일으켰다. 게다가 이 시기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 농한기이자 추수가 끝난 다음이라 여유가 있어 범죄자들도 극성을 부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치안은 유지되었고, 치안을 위협하는 탐관오리나 토호세력들은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고도 교화가 되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지역의 ‘독사’ 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관용도 베풀지 않고 확실하게 처단했다. 담현의 토호 허중손(許仲孫)은 모든 백성이 이를 갈 정도로 나쁜 짓을 일삼아 왔다. 무엇보다 세력이 막강한 탓에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전임 태수는 이 패거리들의 위세에 눌러 옴짝달싹 못했을 정도다. 결국은 호랑이 길러 후환을 남기듯이 끝내 군에서 가장 큰 해악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윤옹귀는 모든 방해와 간섭을 물리치고 허중손을 잡아들여 법대로 처리한 다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저자거리에서 그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소식은 전해지자 군 전체가 떠들썩했고, 이후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동해군은 이렇게 잘 다스려졌고, 백성들은 윤옹귀를 한껏 칭찬했다.
동해군에서의 탁월한 치적은 윤옹귀를 도성 장안으로 불러오게 만들었다. 장안의 치안을 책임지는 세 자리 중 한 자리인 우부풍(右扶風)이 되었다. 당시 우부풍은 진령(秦嶺) 이북과 호현(戶縣)·함양(咸陽)·순읍(旬邑) 서쪽 지구를 관할했다. 그 직무는 태수에 상당하지만 지역이 경기에 속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했다.
윤옹귀는 큰 책임감으로 자신의 자리에 충실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청렴하면서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관리들을 조수로 선발했다. 이들은 평소 서로를 존중하고 동고동락하다가 법을 어기거나 기강을 어지럽히는 관리들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엄벌로 징계했다. 조수들은 대부분 있는 힘을 다해 윤옹귀를 따랐다.
윤옹귀는 동해군에서의 경험을 살려 기강을 엄하게 바로잡은 일부터 시작하여 각 현의 불법을 일삼는 자들의 범죄 사실을 전부 공문서로 만들어 대비했다. 지방에서 일단 범죄 사실이 발견되면 윤옹귀는 여러 정보와 관련 문서를 총동원하여 범죄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처리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그런 다음 해당 현의 현령위를 소환하여 범죄를 저지른 주범의 이름을 정확하게 통고하고, 정보와 자료들에 근거하여 그들이 저질렀거나 저지를 수 있는 범죄 활동의 패턴과 그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들을 알아내는 방법을 가르쳤다. 지방관들은 이에 근거하여 범죄 상황을 파악하여 일거에 이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윤옹귀가 일러 준 예측과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해서 우부풍의 범죄는 거의 완벽하게 방지될 수 있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윤옹귀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범죄 사건을 처리한 귀중한 선례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청백리 윤옹귀가 남긴 영향
윤옹귀는 우부풍을 다스리면서 지역 토호 세력의 위법 활동을 엄단하는 것을 제1 임무로 여겼다. 죄를 저지른 토호는 가축을 관리하는 장축관(掌畜官)으로 압송하여 엄격한 감독을 받으며 노역을 살게 했다. 일부 토호는 태형의 치욕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기도 했다. 도성과 그 주변 지역의 악당들은 윤옹귀의 위엄에 떨었고, 그의 이름만 나와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우부풍은 이로써 크게 잘 다스려졌다. 윤옹귀가 관할하는 경내에서는 작은 범법 행위가 있어도 체포되었고, 체포 비율은 다른 지역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월등했다.
윤옹귀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 방법은 형벌에 강력하게 의존하여 범법자에 대해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고 가차 없이 죄를 물었다. 그러나 윤옹귀는 동료들에 대해서는 청렴으로 존중하고 사사로운 일은 일절 입에 올리지 않는 것으로 명성을 높였다. 모든 일을 공과 법으로 처리했다. 사사로운 청탁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앞세웠다. 윤옹귀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 안팎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선제 원강 4년인 기원전 62년 윤옹귀는 우부풍 자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50을 넘기지 못한 젊은 나이였다.
윤옹귀는 현의 말단 관리에서 시작하여 태수와 우부풍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이 조정의 팔다리와 같은 역할을 해냈다. 그는 관료 생활을 20년 동안 어떤 뇌물도 받지 않았고, 위로는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아래로는 백성을 억누르지도 않았다. 평생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엄격한 법집행으로 지역 사회의 악당들을 처단했다. 죽은 다음 재산도 하나 남기지 않았다.
선제는 윤옹귀의 뛰어난 치적과 고상한 인품을 알고는 그의 이른 죽음에 슬픔과 아쉬움을 표하면 특별히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칭찬했다.
“우부풍 윤옹귀는 청렴하고 멸사봉공했으며, 단정한 품행으로 토호 세력을 쳐내고 백성을 잘 다스리니 그 성적인 뛰어났다. 감히 신료와 백성의 모범이라 할 것이다. 안타깝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조정의 일을 계속하여 더 큰 업적을 세울 수 없으니 짐은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특별히 윤옹귀에게 황금 백 근을 내리니 그 제사를 잘 모시도록 하라.”
윤옹귀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아버지의 덕을 계승하여 청렴하게 벼슬살이에 임하여 태수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작은아들 윤잠(尹岑)은 구경(九卿) 반열에까지 올랐고 관직은 대장군에 이르렀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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