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다시 제주로(2)

보목포구에서 바라본 한라산정상.
보목포구에서 바라본 한라산정상.

계단을 타고 폭포를 마주하러 내려가는 길,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꽃이 피었다는 증표인데 발밑에 처연하게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 겨울을 이겨낸 동백들이 벌써 피어나서 지고 있는 것이다. 

동백꽃을 보면 나는 보길도의 강제윤 시인과 그 보길도에 놀러 가서 어릴 적 만났던 여자친구들의 이름을 호명한 이원규 시인과 선운사에서라는 시로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잠깐이라고 노래한 최영미 시인, 저 선명한 각혈이라고 말하던 김명인 시인을 떠올린다. 물론 제주이니 강요배 화백과 4·3항쟁은 말할 것도 없이. 사실 서귀포의 천지연폭포 쪽은 천연난대림 지역으로 이 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곳으로 알고 있듯, 이 지역도 바로 지척이니 그렇겠다 싶다. 

커다란 바위들이 뒤섞인 자리에 해녀들은 천막을 치고 해산물을 팔고 있다. 머리 위로 비는 내리는 듯 마는 듯한데 폭포에서 바람에 섞여 날려오는 물줄기가 마치 분무기를 얼굴에 분사하는 듯하다. 희소가치가 높은 폭포를 만나는데 게다가 독점해서 보는 시간인데 무엇인들 주저할 이유가 없다. 흐린 날씨지만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물줄기는 얼음장처럼 하얗게 떨어지는 광경을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다시 길을 돌려 숙소로 돌아온다. 벌써 1시에 육박하니 모두 일어났을 것이란 예감이었다. 그랬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몸뚱아리는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은 시신 같은 존재감들이 숙소에 있었다. 하지만 이내 튀어나온다. 배도 고팠을 것이고, 그렇게 오고 싶었던 섬에 왔는데 이 시간이 아까웠을 것이다. 

바지런을 떨어 모두 차에 올라 식당으로 간다. 제주식의 밥을 먹고 다시 숙소에서 좀 쉬다가 저녁을 걱정한다. 이 겨울 제주의 식도락은 대방어를 먹는 것이다. 모슬포가 이런 방어의 집산지이니 모슬포의 한 횟집을 목표로 하고 송악산을 거쳐 횟집을 가기로 했다.

풍경 이면 역사의 상흔 고스란히

시간의 격차가 나니 모두들 숙소에서 또 쉼을 택한다. 근처에 카페가 있어 커피도 몇 잔 빼 오면서 누군가를 음악을 듣고 누군가를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아들 호연이는 이어폰이 귀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양식들이 있으니 관여할 일은 아니고, 나는 그저 멍하니 숙소의 창문이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나온 장면의 바다가 보이는 창처럼 생겼으니 그곳만 응시하다 시간이 얼추 3시가 되었다. 

아끈다랑쉬와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와 다랑쉬오름

송악산 즈음에는 비가 덜 내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당도해 보니 웬걸 비는 송악산으로의 접근하는 것은 지금 현재 제주 날씨 중 최악의 상황과 대결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비 맞고 내려오는 관광객의 모습이 이를 실증한다. 

송악산 근처에는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와 백조일손지묘가 있다. 일제의 침탈과 다시 해방정국에서의 격랑이 이곳을 편하지 않은 땅으로 만들었다. 저 멀리 보여야 할 가파도나 마라도는 비바람이 가려 버리고 다행히 형제섬의 모습만 둥실 떠오른다. 
격랑의 바다를 살아갔던 제주 사람들의 삶은 곳곳에 존재하지만, 이곳만치 아픔을 동시에 껴안고 사는 곳이 어딘가 싶어진다. 관광객에게는 풍경이겠지만 적어도 제주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곳은 풍경의 이면에 눈물 자국에 아롱진 곳이란 것을 다 알 터이다. 오죽하면 모슬포를 못살포라고 부르기까지 했을까. 

우리는 잠시 송악산 입구의 농촌 청년들이 열고 있는 매장으로 다가갔다. 다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각. 비는 흩뿌리고 그들은 매장의 문을 닫고 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봐 귤이나 농산물을 살려고 했지만, 영업시간이 종료되었다는 건조한 이야기에 그 앞 차량에 써진 글씨들, 이를테면 농촌 총각에게 시집오라는 말이나 신뢰할 만한 그들의 땀이 담긴 생산품이란 글이 머쓱하게 들어왔다. 

까이고 난 기분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음 행선지는 방어가 기다리고 있는 모슬포니 다시 기대감을 충전하고 출발했다. 바람은 거칠었고 비는 더욱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 계절의 별미이니 조심스레 운전하며 식당에 들어섰다. 예약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중에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은 만석이었다. 자리를 잡고 방어를 주문했다. 그러나 우리는 금방 실망감에 젖어 들었다. 어제부로 방어가 떨어지고 풍랑으로 조업이 안 되니 다른 것을 먹으라는 말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방어도 놓치고 고등어회로 대신

하는 수 없이 고등어회와 갈치조림을 주문했다. 기대했던 음식이 아니라 실망 그 자체였지만 확인 못 한 우리의 잘못이니 고통을 감수하고 꾸역꾸역 먹고 나왔다. 하지만 다시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서귀포 올레시장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방어도 사고 다른 것들도 사면서 저녁 모임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내일 한라산 등반을 위해서는 그 양을 조절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지만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또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문자가 왔다. 내일 기상이 안 좋아 한라산 정상부는 개방하지 않는다는 통보였다. 정상을 가겠다고 일 년여 동안 꿈꿨던 일들이 와그르 무너졌다. 그런데 모두들 더 잘된 것 같은 저 표정은 무엇일까. 

냉동창고를 개조한 공백의 전시관
냉동창고를 개조한 공백의 전시관

결국 그렇게 장소를 옮겨 근 십여만원어치의 시장을 보며 난생처음 해삼이 저렇게 크다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야심한 시간까지 우리들은 또 문화 현장에 대한 이야기로 사뭇 진지하게 논의했다. 세대 간의 간극이나, 장르 간의 차별, 중간지원 조직의 사명 같은 말로는 해결안될지 알면서도 대비하고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새벽 한 시까지 두게 했고, 그들은 세 시경에나 파했다. 

마지막 날 한라산의 구애가 없는 후배들은 일어날 줄 모르고 잠 없는 나만 일찍 일어나 설거지와 짐 정리를 하니 훌쩍 열 시가 되어버린다. 산에 가야 한다면 6시에 일어나도 시원치 않았을 몸들이 저렇듯 게을러진 것이다. 

모두를 추슬러 또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는다. 보목포구의 분재정원을 옮겨 놓은 듯한 식당의 음식은 정갈했고 맛은 깊었다. 어젯밤에 한라산이 우리 목표에서 사라져 버린지라 모두들 홀가분해 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들고 온 장비나 준비한 음식들에 대한 서운함도 있을 터인지라 행선지를 잡을 때 적어도 오름 하나 정도로 만나자고 하고 우선은 보목포구에 나갔다. 포구의 등대와 조업을 위한 테우를 보다 자연스럽게 눈을 들어보니 한라산 정상 안부가 환히 보인다. 

날씨 안좋아 무너진 1년 프로젝트

이 어쩌란 말인지 평소보다 더 맑고 선명하게 정상의 백설이 눈에 들어온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우리를 속이지는 않았을 터인데, 적어도 어젯밤의 기상 예보는 한라산에 안개가 자욱하여 윗세오름까지만 등반을 허락하는 터였는데, 그래서 우리는 묵혀둔 숙제를 더 묵히기로 했는데, 하늘이 심술을 부려 그럼에도 한라산의 품에 안길 이들만 허락해준 셈이었던 것 아닌가.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그저 아쉬움에 입맛만 쩝쩝거렸다. 제주 날씨의 변덕은 자주 보아온 터이지만 좋은 날씨가 나쁘게 변하는 것에 책망만 했지 나빴던 날씨가 좋아지는 것에는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 자기 여건만큼 제주를 아는 것이고 사용하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속았다는 생각에 더해 우리들 스스로의 나태함이 주는 벌 아닌가 라는 자책까지 겹쳐지며 종내 시무룩해지는 분위기를 털고 모두를 달래어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서귀포에서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이다. 남원과 표선을 거쳐 용눈이에 당도하니 여기도 상황이 만만치 않다. 10여 년 전만 해도 오름을 찾는 이들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올레길 만큼이나 오름을 찾는 수효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주차장이 차로 가득한 상황이고, 오름의 능선을 보니 등산객으로 가득하다. 

비와 풍랑의 형제섬
비와 풍랑의 형제섬

마스크를 쓴 등산객이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같이 간 일행에는 공공기관에 있는 이도 있고, 호연이는 학생이기도 하니 내 스스로 포기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과 동시에 바로 옆에 나부끼는 현수막이 말한다. 입산통제가 시작되는데 그 날짜는 바로 2월 초부터라는 것이다. 내 마음의 성지처럼 찾았던 그래서 제주에 오기만 하면 들렸던 용눈이 오름도 이제 사람들에게 부대껴서 쉬어줘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과 동시에 지금이라도 가자고 할까 라고 말 바꾸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눌러 참았다. 

잠시 차 안에서 능선을 다니는 이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던져주다 이내 차를 몰아 다랑쉬오름으로 향했다, 다랑쉬는 두 개의 오름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으로 아끈다랑쉬와 다랑쉬로 형성되어 있다. 다랑쉬의 뜻은 달이 뜨는 것을 의미하니 성산포로 뜨는 달이 잘 보이는 오름이고 아끈이란 말을 작은 것을 뜻하니 작은 다랑쉬오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문화공간 ‘공백’서 한나절 해찰

달을 옛말로 “달아”라고 했으니 이를 고어로 하면 다랑이랑 맞는다 한다. 큰 다랑쉬오름에도 등반객들이 줄지어 올라간 데 비해 적은 오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이 또한 좋은 기회이니 우리 넷은 아끈다랑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경사가 완만하고 오름 정상에는 분화구가 파여 있어 그 둘레를 넓게 돌 수 있는 데다 오늘 가지 못한 용눈이 오름, 다랑쉬오름, 성산일출봉, 우도 등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과 같은 곳이 아끈 다랑쉬 오름이다. 거기에 아직 삭아들지 않은 억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니 모두의 만족감을 충족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다.

가성비가 높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오름 등반은 모두의 흡족한 모습 속에 마감되었다. 이제 서서히 제주일정을 마감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두 시간 전에 마감하고 한 시간이면 넉넉하게 공항에 도달하지만, 이제는 세 시간 전에 출발해도 수속체크를 하는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많다. 코로나 상황이라서 관광객이 없을 것이라 예단한 것도 내 자만이었음을 느꼈기에 서둘러 공항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제주는 아쉬움을 주는 곳이다 보니 또 한 번 해찰을 했다. 공백이라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카페와 베이커리는 신축 건물에 담고 냉동창고는 리모델링해서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그곳에는 카메라 제조사인 라이카의 40번째 시상작을 전시하고 있었다. 

늘 새로운 매력물들이 들어서는 제주이기에 살펴보면서 다음에 또 와야 할 이유를 찾고 말았다. 눈 쌓인 한라산이 다음 목표이고, 그다음은 제주의 자연을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고, 그 뒤를 이어 제주의 문화공간도 찾아볼 욕심들. 그런 욕심 탓에 공항에서 허우적거리다 하마터면 하루를 더 보낼뻔한 제주행이었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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