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창 어르신 자서전] (3)

온 가족 완전체로 찍은 우리 가족 사진. 김재창 어르신 제공
온 가족 완전체로 찍은 우리 가족 사진. 김재창 어르신 제공

중학교 입시 시험에 낙방하여 아버님 꾸중이 두려워서 보성, 서울, 만주 길림성까지 전전하시면서 객지 생활을 하셨던 큰 형님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귀향하시어 집에 머무르시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 가셔서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1960년 6.25 동란이 발발했다. 광주에 계신 큰아버님(만주 길림성에서 같이 계셨던 김재명 장군 가족)의 가족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와 피난살이를 했고, 전쟁이 끝날 무렵 4촌 큰아버님 가족들은 다시 광주로 올라 가셨으나 우리 큰 형님은 동행하지 않아서 행방불명이 됐다. 생사조차 알 길이 없어 소식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간부 후보생으로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셨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어머님께서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 같다고 하시면서 기쁨에 넘쳐 나를 데리고 광주 상무대 훈련소로 면회를 갔다. 면회를 다녀오신 어머님께서는 큰 형님이 살아있다는 즐거움 속에서 희망이 부푼 생활을 하시면서 보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형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장만해 면회를 가셨고, 아들 얼굴 보는 즐거움으로 사시는 듯 했다. 보병학교를 졸업한 형님께서는 일선지구로 배속되셨다. 그러나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성립되기까지의 전쟁은 날로 격심해져서 많은 국군장병들이 전사하고 있다는 소식에 어머님께서는 매일 지극하신 정성으로 형님의 무운장수(武運長壽)를 빌고 또 비셨다. “니 형님은 명천하신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있으니 절대로 전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어느 동화책이나 전설의 고향에서나 읽을 수 있는, 실제로 어머님께서 겪으셨던 사면을 회상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말씀해 주신다.

고귀한 모정

“부처님 오신날(음력 4월8일)을 맞아 부처님께 느그들 무병장수를 축원드리기 위해 장흥 유치 보림사 절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집에서 보림사 절을 가려면 높은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하고 40리 길이 넘지만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서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으나 힘이 없어 대(竹)지팡이에 의지하고 걷는 걸음이라서 보림사 절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었다. 그런데 다행이 산길을 벗어나서 큰길로 나와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온 몸에 싸늘한 기운이 덮쳐서 앞을 바라보니 집채만 한 호랑이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었단다.”
그래도 어머님께서는 정신을 잃지 않으시고 정신을 더욱 가다듬으면서 가던 길을 재촉하시며 짚고 가시던 지팡이를 더욱 힘차게 휘두루시고 “죽자고나 죽자고나”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보림사 절을 향하여 걷고 있는데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났다. 어머님을 당장 잡아먹을 듯 하던 호랑이가 마치 집에서 기르던 개처럼 순종하며 앞길을 안내해줬다. 늦은 시간에 절에 도착하니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주지스님의 대접을 받고 부처님께 축원 드리고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몸에 온기를 느끼면 사람을 만나고, 냉기를 느끼면 산짐승을 만난다는 것은 들은바 있어 내 앞에 큰 짐승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고, “죽자고나, 죽자고나” 하는 소리의 외침은 부처님 탄신일을 맞아 자식들 무병장수를 위해 불공을 드리러 가는 길이니 나를 잡아 먹더라도 내가 불공을 다 드린 후에 잡아먹으라는 뜻으로 호랑이에게 외쳤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느그들은 하늘이 내려주신 목숨이고 부처님께서 돌보아 주신 목숨이라서 어떠한 재난이 있어도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게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하셨던 둘째 형님을 6·25때 천추의 한을 안고 하늘나라로 가서 잃어버렸으니 그 슬픔과 애절함 속에 평생토록 가슴앓이의 병마와 싸우다 돌아 가셨던 어머님의 생각이 너무도 그립게 떠오른다.

험난한 세파 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꿨고 험난한 세파 속에서 갈길 몰라 방황했고 또 병마까지 겹쳐 시달리고 있던 중 큰 형님이 강원도 일선지구(인제군 간성면)에서 복무하고 계신 부대의 휴가병을 따라 나섰다. 답답한 이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피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일선지구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지만 형님께서 후방으로 전근 발령을 받아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당시 군대 소집 영장이 나왔더라면 군대라도 갔을 터인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현실은 이 비참한 환경에서 탈피해야겠다는 비상(非常)한 각오를 갖게 했다.
외사촌 형님이 부산에서 큰 사업을 하고 계시다는 큰 이모님의 말을 들은 바 있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외사촌 형님께서는 부산 남포동에서 큰 당구장을 경영하셨고, 또 전국을 무대로 흥행 사업을 하시면서 사업가의 역량을 발휘하고 계셨다. 나는 그 형님 밑에서 열심히 근무하며 모처럼 보람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1960년 4·19학생의거까지 맞게 되니 형님의 사업이 번창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사업을 정리하고 처가가 있는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성공하여 어머님을 봉양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무단가출을 해서 집을 나왔던 나였지만 24세가 되도록 자립할 수 없는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내가 근면성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셨던 형님께서는 앞으로 ‘내가 서울에 가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니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셨다. 이렇듯 형님· 형수님의 권유를 받고 형님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됐다. 우리 사촌형수님은 이북 재령군이 고향인데 부모님과 함께 일찍 남하해 서울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에 정착하시어 5층, 3층 등 큰 빌딩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동대문 시장에서 큰 사업을 하시는 등 사업에 성공하신 부모님이 계셨다. 부모님께서 주신 5층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4·19학생의거 이후 시국은 더욱 혼란에 빠져 들었고 급기야는 1961년 5·16군사혁명까지 발발하고 보니 사촌형님께서 구상하고 계획했던 사업이 점차 멀어져 갔다.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 하고 있던 나는 다시 한 번 형수님의 간곡하신 권유를 받아들여 남동생이 겸업하고 있는 다방에서 관리업무를 봐주며 형님이 사업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돈암동 전차종점 부근 2층에 위치한 양림다방(楊林茶房)인데, 30여 평 넓은 홀에 얼굴 마담을 비롯해서 레지(종업원) 3명, 꼬마 1명이 종사하고, 주방에서는 주방장과 남자 꼬마 1명이 종사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다방에 소요되는 제반물품 관리와 매상 전표를 점검하고 금전관리 등을 매일 보고하는 업무였다. 어찌 보면 부정을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는 자리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정도(正道)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기에 형수님께서 추천해주셨던 나의 성실 근면함을 인정받았다. 주방장, 마담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동료가 되었다.
그때 당시 다방 운영 성패의 핵심은 미모와 수단을 겸비한 얼굴 마담 또 레지들의 역할과 커피 맛으로 판가름 났다. 어느 다방에 예쁜 레지가 들어왔다, 또 커피 맛이 기막히게 맛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밀물처럼 들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당시 커피는 커피 원료를 이용하여 직접 뽑아야 되는데 물 끓인 온도, 시간, 특별히 첨가하는 첨가물(예로 계란껍질, 밤 껍질, 오렌지 말린 껍질 등)을 어떤 비율로 넣고 끓여야 순하고 맛있는 커피가 생산되느냐는 것은 주방장들만이 아는 1급 비밀이고 특단의 기술이기에 주방장 1급, 2급으로 분류되어 월급이 결정됐다.
우리 주방장은 충남 서천이 고향(박성달, 가명)인데, 다방 꼬마 때부터 다방 생활을 하였음인지 커피 맛이 좋다는 평을 받았고 여종업원들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마담 레지들이 종사하고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특히 ‘미스 현’이란 레지는 광주가 고향인데 부친께서는 지방관청장까지 역임하신 고위직 공무원이셨고 본인은 광주에서 명문고로 알려진 J여고 출신인 노영란(가명)이란 이름을 가진 아가씨였다. 성씨조차 노씨가 아닌 현으로 바꿔 사용하였던 것은 여고 동기 동창생인 옛날 광주 갑부의 대명사였던 현준호(가명) 씨의 딸과 서로 헤어지면서 성씨를 서로 바꿔 쓰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재창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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