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창 어르신 자서전] (5)

신혼 때 아내와 기념사진.
신혼 때 아내와 기념사진.

오호라! 아! 하늘을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삼능공업사 대표자의 능력 부족에서 오는 결과였는지는 몰라도 사활을 걸고 정성들여 제조했던 샘플이 검토되지도 선택되지도 않은 체 되돌아왔다.

너무나 기막힌 현실을 원망하며 나는 나락의 지옥으로 떨어진다. 불철주야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나. 그 공적은 인정해주진 못할지라도 사업 실패가 마치 내게 책임이 있는 양 불신과 질책을 거듭하며 인격적인 모독을 다 쏟아냈다. 공장방에서 기식하며 2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단돈 10원 짜리 한 장 얻어쓰지 못했고 오직 세끼 밥 얻어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그래서 배고프고 목이 말라 지쳤을 때도 갈증과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양말 장갑 한켤레 내돈 주고 살 돈이 없어 손이 얼고 발이 얼어 동상까지 걸렸던 시절이었다. 또 친구가 찾아와서 무등산장으로 물놀이 갔을 때, 속옷이 다 찢어져 물속에조차 못들어갔던 적도 있다. 친구는 나를 보고 병신같다는 인격 모독, 심지어는 도둑놈으로까지 치부해버리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이 세상을 정의롭고 올바르게 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온 나다. 사치, 허영,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왔고 중풍으로 병석에 계신 어머님을 오직 식모에게만 맡기고 냄새가 난다고 방에 들어와 보지 않았던 사실들을 회상할 때 원망스러움보다도 슬픔이 앞섰다.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기본 윤리이기에 부모에게 효도했던 많은 사람들은 복 받고 산다.

그래서일까. 형님 내외분 다 병마와 싸우다가 제명에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이제는 과거 너무 고생만 하시고 사셨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스런 여생을 보내셔야 할 어머님이신데 중풍의 병고에 고통받고 계신 어머님을 위해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나의 현실이 너무나도 처절하고 슬프기만 하다. 병석에 누워 고통당하시면서도나를 여우지(결혼시키지) 못한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하시며 어머님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슬픔에 잠기셨고, 찾아오는 친척들, 또 주위 사람들에게 내 중매를 하소연하시었다.

나를 중매하여 결혼까지 성사시켰던 분은 신부집이나 우리집 양가 다 잘아는 분이셨다. 저녁 늦은 시간가지 우리집, 신부집을 오가면서 신부집 이야기 또 우리집 이야기를 전하면서 신부 신랑이 천생배필인 것 같으니 상견례라도 갖자고 하셨단다. 어느 정도 의사가 통했든지 신부집에서 상견례를 갖게 되었는데, 주인공인 신랑은 허술한 옷차림인데 같이 따라온 형수라는 사람은 호화찬란한 옷 차림에다 화려한 치장의 몸 단장! 그래서 신부 가족들에게 비쳤던 첫인상이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중매인이 전했다.

1966년 노총각 장가가다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막내딸을 누구보다도 더 좋은 배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셨기에 부모님들을 비롯 언니 오빠 또 주위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나를 테스트하였고 또는 오빠 되시는 분들이 신분까지 가장하여 사업가처럼 공장을 찾아와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해갔던 일들이 있었음을 사후에 알았다.

우애가 없다, 사치성이 강하다, 빚이 많다는 등 갖가지 결점이 총망라된 상태에서 결혼을 성사시킬 부모 형제들이 아니었겠지요. 신부댁에 들러 늦은 시간까지 술을 드시고 우리 집에 들르신 중매인은 신부와 신랑이 너무 좋은 배필이어서 결혼을 꼭 성사시키려고 했는데 무산될 것 같아서 안타까워하시면서 그러나 신랑당사자 말은 술도 담배도 전혀 하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하라는 것을 부모형제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이 전혀 실망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하신다.

신부 집에서는 부모 형제들 간의 찬반이 교차되는 가운데 부모님께서는 본인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사항이니 본인들이 직접 만나 대화를 가져 보라는 부모님들의 의사를 받아들여서인지 신부 본인과 수차례 상면하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당시에 처해 있는 사실들을 거짓 없이 사실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서 선택하라는 기회를 주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좋다는 사주팔자다”, “초년 고생은 황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말들을 부모님께 들었던 바 있어 내가 고생하면서 살아가면은 꼭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음인지 본인의 결심으로 어머님의 무한하신 기쁨과 축복을 받으면서 1966년 12월27일 31세된 노총각이 23세의 신부와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결혼 전날밤은 갑자기 몰아닥친 강추위로 서설(瑞雪)이 내려서 정말 깨끗한 지구를 형성하여 주셨고 결혼 당일은 따뜻하고 영롱한 햇빛을 비추워 주시니 정말 우리들의 결혼식을 하늘도 축복해 주시는 듯 하였다.

비참했던 결혼 살림

능력도 대책도 없었던 상태에서 결혼을 하였던 나는 독신으로 있을 때보다 더 어렵고 고통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로 나타나는 상황은 정말 눈물겨웠다. 힘겹게 얻어주었던 4만원짜리 전세방은 온기조차 없는 좁은 상하방, 쌀 한 말, 연탄 100장, 숟가락, 젓가락 2벌, 밥그릇, 국그릇 각 2벌, 밥솥 1개, 연탄집게, 방 비, 쌀독 1개 등 자취학생과 비슷한 살림살이였다. 분가(分家)하며 신혼살림을 시작한지 3개월이 넘도록 10원짜리 한 장 가져오지 못한 생계는 바로 생지옥 같은 생활이 되었다. 신혼의 단꿈을 꾸고 행복스러운 신혼 생활이 되어야 할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만이 사무쳤다.

여기 신혼생활의 처참했던 일기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본다.

-1967년 3월15일 수요일, 날씨 흐림.

분가되어 첫 저녁을 맞이했을 때 정말 심란스러웠고 위험만이 앞을 가리는 듯 했습니다. 연탄 100개와 쌀 한 말. 이것이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구요? 연탄 100개와 쌀 한 발이 화수분이 되어 100년을 먹고 뗄 수 있기를 바랐다면 무한히 어리석을 테지요? …

처는 매일 앓고 있었습니다. 지금 알고 보니 애를 갖는 복통이었습니다. 매일 밥도 먹지 못하고 들어 누워만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가용 한 푼 주지 않은 상태, 그렇다고 도둑질 할 수도 없는 처지, 반찬 한 가지, 약 한 봉 사다주지 못한 내가 무어라고 큰 소리를 칠 수 있을까요? 나는 큰 집에서 식사하니 그래도 괜찮으나 처는 먹지 않고 있으니 몸은 수척해지고 말이 아니지요. 분가한지 한 달이 넘어가니 연탄 100개와 한 말의 쌀은 자꾸 줄어듭니다. …

내가 고통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농고에 계신 사촌 형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가히 추천할 만큼 좋은 곳은 아니지만 모영아원에 가서 근무해 보라고 하며, 그곳 원장님하고는 동향인이라서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면담을 요청하셨다 한다. 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곳은 불우한 영아들을 양육하는 영아원으로 모든 것이 열악하고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농장 관리 등 책임을 맡아줄 사람을 구하고 있는 중이니 여기 와서 근무해 주라”였다. 그래소 입소한다. 한 주에 한 번씩 (일요일) 교회에 참석하고 집에와 보는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임신한 몸으로 먹고 싶은 음식조차 먹지 못하고 혼자서 겪는 슬픔과 외로움에 눈물로 지새우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걷잡을 수 없는 눈물만이 쏟아진다.

이 처참한 현실에 저항이라도 하고 싶었던 심정이라 할까.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성실하게 근무했기에 원장님의 각별하신 신임을 얻어 더욱더 중책을 맡으면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아내가 분만일을 맞았던지 산고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급히 달려가 보니, 밤새도록 혼자 사경을 헤매이고 있던 아내가 나를 보더니 부등켜 안고 통곡을 한다. 못난 내 자신을 원망하며 함께 통곡하고 있기엔 너무 위급한 상황, 급하게 모신 조산원 원장님의 도움을 받아 그 위기를 넘기면서 1967년 9월4일 첫 딸을 순산했다.

기진맥진해 있는 산모에게 첫 국밥을 끓여줄 미역 한 가닥, 한 줌의 쌀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그 때의 참혹했던 비극을 어떻게 표현할 수 조차 없었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그 대의 처참했던 비극을 나는 잊은 적 없다. 그렇게 고통을 겪고 출산했던 보람이 있었던지 아니면 하늘도 감동해서 내려주셨던 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첫 딸은 살결 곱고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공직생활과 아내의 봉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불우한 역경 속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근무했던 그 곳 원장님의 추천을 받아 한국전력 전남지사 직속 수금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성실함을 잃지 말고 열심히 근무하여 모범사원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도 해주시었다. 당시 전기요금 수금 업무는 직접 방문 수금을 하게 되었는데 농어촌 전화사업으로 담양군 대전면 일대 281호의 농가에 전기가 보급되어 수금업무를 동네 청년을 임명하였으나 수금 실적이 너무 나빠서 해임 시켰던 곳으로 내가 재임명 받았던 곳이었다.

첫 출근하는 나를 붙들고 아내의 다짐은 “어떠한 애로와 난관에 부딪힐 지라도 부정을 물리치고 열심히 근무하여 떳떳하고 정의로운 일등 사원이 되어 우리 가문을 빛내주라. 갓 태어난 첫 딸과 함께 맹세하자”는 아내의 간곡한 부탁은 내가 근무하는 동안 근무 지표가 되었으며 눈물로 호소했던 아내의 모습을 잊은 적이 없었다.

수용호수가 281호 였는데 미수금 포함 551매의 전기요금 영수증을 인수 받아 수금 업무에 전력을 다 한다.

광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담양군 대전면의 현장은 하루에 6번 왕복운행하는 시내버스(삼양시내버스)가 있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아침 6시에 출발하는 첫 차를 타고 현지로 수금업무 수행차 출근했다. 산재해 있는 3개 농촌 마을의 수금 업무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렵고 벅찬 일이었으나 어떤 난관과 곤경 에서도 나의 집념과 노력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야 대화도 나누고 수금도 되는데 농촌마을이라서 아침 일찍부터 들에 가서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집이 비워있어 정말 애로가 많았으나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방문하는 나의 열성에 주민들께서는 많은 협조를 해주셨다.

농촌마을이라서 밥을 사먹을 수가 없어 헤매이고 있을 때 저녁 막차를 놓쳐서 방황하고 있을 때 한 식구처럼 먹여주고 잠재워 주셨던 순박하고 인심좋은 은혜를 입어 수금 성적은 언제나 1등을 하였으며 6개월 동안의 수습기간을 거쳐 1968년 3월22일 자 본사 사장이 임명하는 임명장을 받게 된다.(그 신분증은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음)

<다음에 계속>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관련기사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