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을 만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빠르게 그러나 적당히’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다윈이 해양탐사를 위해 탔던 비글호.
다윈이 해양탐사를 위해 탔던 비글호.

나, 생을 향해 말한다. - 너는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한결 더 개구리답고, 마냥 밤꾀꼬리답고,

무척이나 개미답고, 꽤나 종자식물답다.

생으로부터 사랑받고, 주목받고,

찬사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순종의 의사를 얼굴 가득 드러내고서

언제나 제일 먼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기를 쓰고 쫓아간다.

환희의 날개를 단 채 날아오르기도 하고,

경탄의 물결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이 메뚜기는 얼마나 ‘초원’다운지.

이 산딸기는 얼마나 ‘숲’스러운지.

만약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감히 이런 생각은 품지도 못했으리라!

나, 생을 말한다. - 너와 견줄 만한 대상을

결국 찾지 못했노라.

누구도 이보다 낫지도 못하지도 않은

바로 이런 솔방울을 만들어낼 순 없으리라.

네 관대함과 창의력, 활력과 정확성에

머리 숙여 찬사를 보내노라.

음, 또 뭐가 있을까 - 그래, 더 나아가

네 마력과 묘술에도 경의를 표하노라.

단지 네 기분을 망치지 않기를,

너를 화나게 하거나 귀찮게 하는 일 없기를.

수만 년 전부터 나는 늘 미소를 잃지 않고,

네 비위를 맞추려고 무던히 노력 중이다.

잎사귀의 끝자락을 향해 손을 뻗어

생을 잡아당겨본다.

그래서 멈췄는가?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잠시라도 좋으니 단 한순간만이라도

어디로 가는지 잊은 적이 있었던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빠르게 그러나 적당히’

진화론과 창조론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다. 창조론은 ‘태양은 누가 떠오르게 하는가.’, ‘밤은 왜 빛의 부스러기로 빛나는가.’…인간 이외의 자연 현상에 경도되었던 저 뭍 조상-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의문들로부터 시작해 해답을 찾으려는, 그리하여 뇌의 인지불균형을 벗어나 평안에 이르려는 인간 나름의 해법이자 최선의 대안이었다. 세계는 신이 창조했다. 신은 무소불위하며 어디에나 계시는 자. 신은 광휘이며 전지한 자. 그가 인간을 만든 까닭은 신의 뜻대로 살게 하심이라. 창조론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에게 우연이란 없다. 나고 죽음이 모두 예정된 필연이니, 어쩌면 그 안에서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의 겸손과 수용의 자세를 배워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으니,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주의 이름이, 그분께 인간이 받았다는 계시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창조신은 야훼,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은 하나님, 힌두교의 주신은 브라흐마. 수천 년 간 지속해온 대규모의 전쟁과 국지전은 종교의 명분을 빌어 행해지곤 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뵈지 않는 신의 이름으로, 사실은 권력자의 후광과 존속을 위해 싸웠다. 창조론 안에서 ‘우연’은 없었다.

반면에 생명체의 역사. 인류 기원의 역사를 종교적 관점 아닌 과학의 관점으로 기술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으로 역사를 해명한다. 히틀러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교묘하게 비틀어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 게르만우월주의를 주창했으나 자연선택은 이러한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자연선택에 의하면 오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한 생명체가 살아남는다. 가령, 회색가지나방은 검은색을 띤 개체가 98%에 이른다. 그러나 나방의 ‘이름’이 알려주듯 산업혁명이전까지 회색가지나방의 날개 빛깔은 밝은 회색에 가까웠다. 그러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장의 매연과 석탄그을음으로 인해 목질의 색이 어두워지자, 소수이던 검은 회색가지나방이 가지나방의 개체수를 대부분 차지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나무색에 적응한 회색가지나방의 밝은 빛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는 위장색이 되지 못하자 회색이 검은색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이렇듯 생명은 환경의 변화에 적합한 종이 살아남거나 생명 스스로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켜 적응하며 생을 이어간다. 각각의 종들이 환경에 적응하기위해 선택한 결과가, 그래서 살아남은 역사적 존재가 바로 나, 인간이며 우리이다.

저 먼 기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부터 호모에렉투스와 네안네르탈, 크로마뇽인에서 현세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까지를 생각하면 궁금하다.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를 넘어 도래할 또 다른 진화의 결과물인 후세인(後世人)의 모습은 어떨까. 그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인간이 필연이라 생각하며 구속되어있는-틀마저 벗어나고 넘어설 수 있을까. 다윈이 내게 열어준 인식은, 인간의 역사는 무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다는 자각이다. 물론 당장 나 하나만 보더라도 내게는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이 있다. 나는 왜 21세기에 태어났는가. 대한민국의 중산층 부모를 둔 딸로 태어났는가. 국적과 성별, 타고난 외모는 필연이다. 좋든 싫든 ‘필연’은 일정한 사회적 규약으로서 인간의 행동반경과 태도를 조율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이성의 산물인 과학과 의학기술의 발달은 성별을 바꾸고, 외모를 환골탈태(?)하게끔 하는 수준-혹자는 ‘지경’이라고 할지라도-에 이르렀다. 이제 유한한 신체조건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망은 복제기술을 연구하고 인체의 유한성을 불멸의 자리에 올려놓고자 투쟁한다.

밝은색의 회색가지 나방
밝은 색의 회색가지 나방.

다윈의 자연선택은 인간이 ‘필연과 우연의 조합이 낳은 자식’임을 알렸다. 부모와 시대가 선택할 수 없는 필연이라면 우연은 인간에게 변수와 계기로 작동하는 관계, 사건, 사태들이다. 우연은 내게 급작스레 오지만,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준다. 활자중독인 나의 역사를 만든 우연이자 계기를 떠올린다. 아홉 살의 겨울, 생일선물로 샀던 삼중당 문고. 마루 밑에 숨긴 커다란 금화자루를 한 푼도 남김없이 타인을 위해 써줄 사람이 나타나야만 신의 저주가 풀리는 ‘유령의 소원’, ‘브레맨 음악대’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뒤섞인 잡문 형식의 꾸러미이던 그 책에 내가 흠뻑 빠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문고판 책이 내가 스스로 산 최초의 책이었기 때문이리라. 묘한 일이다. 이전이나 이후로나 생일이면 부모님은 내게 돈이 아닌 선물을 주셨다. 왜 하필 그 날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돈’을 주셨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토록 애정하던 월간지 ‘어깨동무’대신 사과씨앗만한 글씨들이 조르륵 늘어선 책을 골랐을까. 그림책이 아니어도 엄청난 흡입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책이 세상에는 쌔고쌨음을 알게 한 독서경험은, 책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훌륭한 책과 저급한 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가 읽어야할 수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내어놓은 책은 만나야할 대상을 알고 있으며,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무의식적 의문을 해소할 책에 자연스레 빠져든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필연과 변수’가 뒤섞인 세계에 태어나 ‘우연’과 맞닥뜨릴 때, 모든 우연은 ‘세렌디피티’로 통하는 문이 된다. 과학연구 분야에서는 실험 도중에 실패해서 얻은 결과에서 중대한 발명이나 발견을 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세렌디피티’는 전장에서 수만의 병사를 살린 페니실린의 모태가 된 푸른곰팡이 사건처럼 완전한 우연으로부터-우연의 가면을 쓰고 선택을 요구하는 변화의 계기로부터-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는 언어이다. 모든 우연은 세렌디피티로 향하는 축복의 문이다. 그리고 이 많은 변수들이 모여 현재의 내가 되었다. 오늘도 아이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들을 만들며 ‘세렌디피티’로 내게 온다.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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