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병, 러시아 파병 ⓺북한 조종사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출석, 김용현 전 국방장관을 상대로 증인신문하며 웃고 있다. 헌법재판소 화면 캡춰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4차 변론에 출석, 김용현 전 국방장관을 상대로 증인신문하며 웃고 있다. 헌법재판소 화면 캡춰

시리즈를 속개하며 : ‘10월 유신’ 이후 52년 만에 감행된 친위 쿠데타.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은 어디까지일까.

그날 밤, 내란 세력이 국회를 장악했다면 1980년 민간인 학살을 다시 마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일국의 대통령과 당시 국방장관, 변호인들은 헌법재판소에 나와 ‘계몽령’, ‘의원이 아니라 요원’, ‘전공의 처단 문구는 계도용’이라는 궤변을 웃음까지 섞어가며 늘어놓고 있다.

윤 대통령 말대로 ‘집행할 의사가 없었던’ 계엄 포고령이라면 ‘민간인 통행금지’는 굳이 왜 뺐는가? ‘바이든 날리면’부터 시작해 윤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그렇게 우스워 보이는가?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검찰 조직에선 그런 얼렁뚱땅이 통했었나?

‘장소팔-고춘자’는 웃음을 줬으나 이들의 ‘덤 앤 더머’ 급 만담은 허탈하기만 하다.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통치한 지난 2년여, 나라가 무너지지 않은 것 만 해도 다행이라 해야 하나.

무속인과 극우 유튜버에 포획된 자가 대체 누구를 계도한단 말이며 21세기에 군대를 동원하는 계몽도 있는가? 그에게 우리 국민은 몽둥이 한 번 휘두르면 침묵하는 그 정도의 대상이었다니 좌괴감이 든다.

일부 ‘지식인’들의 민주주의 감수성도 씁쓸하다. 탄핵을 반대하거나 심지어 계엄 실패를 아쉬워하는 그들의 논리는 결국 암군(暗君)이자 폭군, 혼군(昏君), 광군(狂君)인 그를 다시 용산으로 모시자는 얘기다.

가관인 건 평소 그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독점한 듯 외쳐왔다는 것이다. 헌법과 사법 시스템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대통령, 그런 파시스트적 인물을 옹호하는 민주주의자도 존재하는가? 그 역설과 저열함에 쓴웃음이 나온다.

어쨌든 42년 전 전두환 정권 보안대에 끌려가 야구 방망이와 군홧발로 짓뭉개지던 필자가(우원식 이재명 한동훈 등도 그날 밤 체포됐다면 비슷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이번엔 ‘개전의 정’이 좀 보였던지 계몽 대상으로 신분이 바뀌었단다. 의왕(義王) 전하의 망극한 성은에 감읍하고 싶다.

비상계엄 사태로 불가피하게 두 달여 중단됐던 ‘베트남 파병, 러시아 파병’ 시리즈를 6회부터 다시 잇는다.

[관련기사] ⓵베트남전쟁

[관련기사] ⓶호찌민과 ‘대한민국 임정’

[관련기사] ⓷‘박호’ 호찌민

[관련기사] ⓸이승만 정부와 베트남전

[관련기사] ⓹박정희 정부와 베트남전

# 사회주의 베트남에 한국 최초로 파견된 연합뉴스 권쾌현 특파원은 부임 한 달 만에 대형 사안을 마주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물러난 지 25년이 지난 2000년 3월. 북한 외무상 백남순이 하노이를 방문한 것이다.

겨우 숙소를 구한 그에게 백남순 취재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일정이 비공개였고 심지어 기자회견이나 발표문은 커녕 코멘트 한마디 없었다.

고민하던 권 기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백남순이 하노이에서 두 시간쯤 떨어진 ‘박장’이라는 곳을 방문한다는 정보가 얻어걸린 것이다. “왜 2박 3일의 짧은 일정에 농촌을 방문하지?”

베트남 관계자는 “식량부족을 겪는 북한이 다수확 품종 벼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자는 ‘반드시’ 현장을 가봐야 한다. 그의 자동차는 호찌민 묘소 참배를 끝내고 나오는 북한 방문단 일행에 바짝 붙었다.

2시간여 추격전 끝에 박장 시가지를 벗어나 외곽까지 따라갔다. 그런데 시골길로 접어드는 입구를 경찰이 막아 더 이상의 마크가 불가능했다.

# 행운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왔다. 백남순 일행이 갔던 지역에 혹시 북한과 관련된 무엇이 있는가를 수소문하던 그에게 한 베트남인이 정보를 건넸다. 자신의 친구가 박장 인근에 사는데 ‘멀지 않은 곳에 일반 묘와는 다른 호화묘지가 있다’는 말을 하더라는 것.

주소를 알아낸 권 기자는 다음날 일찍 현지로 출발했고, 드디어 한 농촌 마을 뒤편에 자리한 ‘열사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 현관문은 닫혔으나 묘소 중앙 전면에 10m 높이로 우뚝 선 ‘영웅들의 뜻을 영원히 기리며’라는 충혼탑이 보였다. 그는 최근 가져다 놓은 듯한 화환을 보며 ‘바로 이것’이라는 느낌으로 온몸이 저려왔다.

마을 촌장이 열쇠를 가져와 묘소 안으로 들어선 그는 백남순이 가져온 화환과 비석 뒤편에 새겨진 붉은 글씨를 보고 정신없이 메모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촌장은 그를 북한에서 온 사람으로 알고 위령탑 문을 열어준 것. 그리곤 묘소 유래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도 직접 총을 들었던 베트남전 무용담까지 들려줬다. 미군 폭격으로 아들과 딸 등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86살의 관리인 할머니도 권 기자를 ‘동지’라고 불렀다. 그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묘소를 떴다.

기사는 사진과 함께 즉시 서울로 송고됐고 주요 외신들이 서울발 기사로 ‘북한군 베트남전 참전 확인’ 기사를 다투어 타전했다. 일생일대의 특종이었다. 얼마 후 베트남 외무부 내외신 정례브리핑에서 일본 기자가 ‘한국 연합뉴스의 북한 참전 보도를 확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외무부 대변인 판 투이 탱은 “다른 우방국과 같이 베트남에 전쟁 기술을 가르치고 장병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왔고 애석한 죽음을 당했다”며 “묘소는 관례에 따라 베트남 정부가 만들어 준 것”이라고 시인했다.

종전 후 25년간 묻혀있던 북한의 참전 사실이 베트남 정부 대변인을 통해 공식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 베트남전은 주로 남쪽에서 진행됐으나, 미국은 1965년 3월부터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으며 '공중전장'도 만들었다. 당시 북베트남의 공군력은 절대 열세였다.

전투기를 지원한 소련과 중국은 확전을 우려, 조종사를 파병하진 않았다. 소련이 훈련 중인 북베트남 조종사가 있었으나 실전에 배치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 주석 김일성은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수백 명의 조종사를 베트남에 파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베트남 미그기를 타고 참전한 그들은 세계 최강 미군 전투기에 공중전 한번 제대로 붙지 못하고 줄줄이 격추돼 8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는 후문이다.

이들의 주검은 현지에 묻혔고 나머지 조종사들은 귀국했다. 북베트남이 먼저 철수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전술에 의존한 북한 조종사들이 북베트남 전투기 숫자만 줄어들게 했기 때문이다.

60년대 후반 한강 변에 살았던 지인은 “열차에 가득 찬 군인들이 우렁찬 군가를 부르며 남쪽으로 달려갔다”고 기억한다. 베트남으로 가는 부대였다. 남북은 베트남에서 비록 대면하진 않았으나 이렇게 다른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그 후 북한 203 공군부대를 찾은 김일성은 조종사들 앞에서 베트남 파병 이유를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정말 그 이유로만 초 일급 인력인 전투기 조종사들을 대거 파병했을까? 다음 회 주제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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